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겼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죽은 다음 무엇을 남기게 될까? 이제는 폐차된 차체에서도 강철과 알루미늄을 분리하는 시대가 왔고, 앞으로는 여기에서 ‘배터리’를 수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미 몇몇 자동차 메이커는 다가올 전기차의 시대를 바라보며, 전기자동차의 개발과 생산 뿐 아니라 그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가장 선구적인 전기자동차 메이커로 많은 이들이 테슬라를 떠올리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양산형 모델을 시판하고, 가장 많은 전기자동차를 판매한 메이커는 일본의 닛산이다. 참고로 닛산은 르노, 미쓰비시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한 시너지를 내고 있는데, 르노 또한 ‘포뮬러 E’ 레이스와 전기차의 판매로 유럽에서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으며 EV 인프라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회사라는 점이 재미있다. 레이스와 EV분야 양쪽 모두 닛산과 르노가 많은 협력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닛산은 지난 2010년 1세대 리프를 출시했고, 이는 역사상 최초의 양산형 전기차로 기록된다. 닛산 리프는 작년 2세대 모델이 발표되어 우리나라에도 올해 출시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전기차가 나왔다고 기존 전기차의 사용자들이 모두 자동차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1세대 리프는 여전히 전 세계의 거리를 누비고 있으며, 당분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전기차’의 자리를 지킬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1세대 리프와 같은 전기차들도 은퇴할 시기가 올 게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차가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가장 먼저 출시된 리프는 이제 8살을 맞이하게 된다. 보통의 잘 관리된 자동차라면 20년 이상을 운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리프가 전기차라는 점이다. 차체와 전기모터가 멀쩡하더라도, 배터리 수명이 다한다면 이 차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다.

아무리 자동차를 잘 관리해도 배터리는 사용할수록 성능이 저하된다. 자동차 메이커의 ‘보증기한’은 배터리가 100% 성능을 낼 수 있는 기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자동차를 구입하고 사용하는 동안 1회 충전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자동차 메이커가 전기자동차를 판매한다면, 그 다음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안정적인 배터리의 공급이다. 특히 배터리의 가격에 소비자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데, 일단 전기차를 구입한 이상 성능이 떨어진 배터리의 가격이 비싸더라도 해당 메이커 제품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인 통계지만, 약 5만km를 달린 1세대 리프의 성능은 사용자가 체감할 수 있을 만큼 주행거리가 줄어들게 된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닛산은 이미 지난 2014년에 1세대 리프의 배터리 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닛산 리프의 배터리 교체 가격은 1kWh당 270달러 수준이었으며, 기존 배터리를 반납한 보상금을 반영해 5499달러에 판매했다. 

닛산의 배터리 교체 프로그램을 통해 4년 가까이 사용한 전기차의 성능을 새것에 가깝게 되돌릴 수 있었고, 당시로서 그 비용은 무척 저렴하게 책정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닛산은 리프의 구형 모델 구입자도 신형 배터리를 선택해 업그레이드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소비자와 판매자 모두에게, 전기자동차의 구입 뿐 아니라 배터리의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닛산은 최근 리프의 새로운 배터리 교체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리프의 사용자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새 배터리를 구입할 수도 있지만, ‘재생’한 배터리팩을 보다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재생 배터리팩은 닛산과 일본 스미모토 사가 지난 2010년 세운 합작 회사인 ‘4R Energy’가 공급하는 것으로, 가격은 신품 배터리팩의 절반 수준인 30만 엔(약 2,850달러)이다.

전기자동차의 배터리팩은 수많은 작은 배터리로 구성되어있다. 오랜 기간 사용한 전기차의 배터리팩을 분해하면 이를 구성하는 작은 배터리들은 일부가 정상적인 성능을 내고, 일부는 원래 성능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져 있기도 한다. 이 중 정상적인 배터리를 수거해 새로운 패키지를 만들기도 하며, 성능이 떨어진 배터리는 자동차가 아닌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게 된다.

 

전기차와 함께 성장하는 에너지 산업

자동차용 배터리팩은 용량 뿐 아니라 순간적으로 높은 수준의 전기 방출량이 요구된다. 그러나 일반 가정용이나 산업용 전기 저장장치의 경우 전기자동차의 그것보다 낮은 전기방출량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전기자동차용 배터리로 사용하기에는 성능이 떨어지는 배터리를 재사용 하더라도 충분한 성능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닛산은 최근 전기자동차의 배터리팩과 태양광 패널을 결합해 만든 ‘가로등’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가로등은 앞에서 소개한 4R 에너지가 제작한 것으로, 가로등을 위한 전선 매설 등이 필요 없어 지진과 같은 재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닛산이 가로등 사업에 뛰어들었다’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것은 ‘나무 하나’를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닛산이 바라보는 ‘큰 숲’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자동차에 탑재되는 대용량의 배터리는 평소 전기를 저장했다가 가정이나 산업시설 등에 전기를 공급하는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고, 네트워크 구성을 통해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전기자동차 자체를 가정에 연결해 충전을 하거나 반대로 전기를 공급하는 역할로 사용하기도 하며, 한편으로 ‘ESS’라 부르는 에너지 저장장치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닛산은 이 ESS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지난 2016년부터 영국의 전력관리회사인 이튼 에너지와 협력해 가정용 ESS 장치를 제작, 공급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닛산이 회수한 리프의 낡은 배터리팩 12개를 재가공해 1개의 ESS 장치를 만들 수 있다. 이외에도 미국의 전력관리 스타트업 그린차지와 협력해 상업시설에 저렴한 비용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절감된 비용의 일부를 수익으로 회수하는 사업 등 다양한 수익모델을 만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기자동차를 판매한 기업 닛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배터리를 판매한 기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닛산이 전기자동차용 폐 배터리팩을 재생하는 것은 자원 재활용을 통해 환경을 지키는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고, 한편으로 미래를 위한 경쟁력 있는 사업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같은 닛산의 노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결과적으로 리프를 구입한 운전자를 위한 혜택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미래의 더 나은 환경은 물론이고, 더욱 저렴한 전기차 그리고 배터리팩의 가격으로 말이다.

<저작권자 © 라이드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