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제토 주지아로(맨 왼쪽)와 현대차그룹 CCO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 현대디자인센터장 이상엽 부사장

현대차는 내연기관부터 하이브리드, 전기차에 수소전기차까지 기술적으로도 다양하고, 세단부터 해치백, 고성능 모델, 크로스오버, SUV 등 형태적으로도 다양한 제품을 생산해 전 세계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자율주행 기술은 물론이고 다양한 개인별 이동수단으로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미래 뿐 아니라 과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현대차의 한 부분이자 브랜드의 역사이다. 현대차를 빛낸 수많은 제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근본은 역시 현대차의 첫 번째 양산제품 ‘포니(Pony)’가 아닐까. 이 포니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포니 쿠페를 디자인한 현대차의 첫 번째 디자이너는 바로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불리는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포니 쿠페를 시작으로 첫 번째 양산모델인 포니를 비롯해 엑셀, 프레스토, 스텔라 등 현대차의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에서 일하며 세계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가 한국을 찾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지난 24일 현장을 찾아 주지아로와 현대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현대차의 첫번째 양산차 포니

행사의 시작을 알린 건 최근 현대차 디자인에 중요한 역할을 한 두 사람, 현대디자인센터 이상엽 부사장과 현대차그룹 CCO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현대차그룹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모델들을 디자인한 건 물론이고, 이미 그 이전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은, 자동차 디자인 업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내로라하는 인물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무대에 오르자마자 오늘의 주인공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다. 이상엽 부사장은 “자신의 멘토가 된 사람이자 본인의 우상”이었다며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되어 매우 영광이다”라고 말했으며,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은 “때론 다른 브랜드에서 경쟁하기도 했고, 때론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던 위대한 분이 동료가 되는 것이 감격적”이라며 “길에서 그가 운전하는 차를 우연히 만나 따라간 적도 있었다”며 자동차 디자인의 전설적인 인물과 함께 작업하게 된 소감을 밝혔다.

조르제토 주지아로

드디어 무대에 오른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가장 궁금했던 건 역시 ‘어떻게 현대자동차와 작업을 하게 됐느냐’일 것이다. 주지아로는 “창업주(고 정주영 회장)가 방문해 자동차 디자인을 요청했는데, 콘셉트카가 아닌 양산 가능한 차를 원했다”는 말로 회상을 시작했다. 작업을 준비하며 직접 한국에 방문했던 그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자동차를 한창 만들고 있는 회사가 아닌, 이제 막 자동차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주지아로가 작업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자동차가 아닌, 의외로 현대에서 만들고 있던 배였다. 주지아로는 “조선소에서 만들어지는 배를 보고 이 회사는 저력이 있다고 판단해 본격적으로 자동차 디자인을 시작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50여 명의 현대차 엔지니어들과 협력해 제작을 시작한 그는 불과 6개월 만에 첫 자동차인 포니 쿠페 콘셉트를 완성해냈는데, 그에 대해 루크 부사장은 “상식선으로 불가능한 속도로 자동차를 완성해내며 ‘현대 스피드’를 보여줬다. 1973년에 요청을 받아 그 다음해에 바로 콘셉트카를 완성했는데,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자 주지아로는 “자동차 프로젝트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수년간의 경험들이 도움이 됐다”며 “아키텍처에 대한 결정을 전적으로 맡겨준 것과 함께 현대차의 기술자들과 협력하는데 있어 그들의 기술들이 많은 도움이 됐고, 그 결과 1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프로토타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에 봐도 빠른 속도지만 당시에도 기적과도 같은 일이고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정을 내린 창업주가 천재라고 생각하고,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싶다”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던 고 정주영 회장에 대해 호평했다.

현대차 공장을 방문해 디자인에 대한 코멘트를 남겼다

불과 1973년에 첫 번째 콘셉트카를 만들었던 회사가 단 50년 만에 세계 시장에서 주목하는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해 주지아로는 깊은 감명을 느낀 듯했다. 이번 행사 전날, 그가 만들었던 첫 번째 차인 포니가 만들어진 현대 1공장을 방문해 그곳에서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아이오닉 5의 생산 과정을 지켜보고 왔다고 한다. 그는 디자이너들과 만나 차량 디자인에 대한 코멘트를 남겼는데, 이상엽 부사장은 “적잖은 나이에도 보는 눈과 해석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우리 디자인팀도 많은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설의 안목에 감탄을 보냈다.

주지아로는 “50년 세월의 차이에는 많은 기술 차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하던 일을 자동화 기계를 통해 쉽게 하는 걸 보았는데, 현대차 초기에 제품을 만들며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엔 서플라이어 수가 적었던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 제품을 만들어냈다”고 과거를 더듬었다. 그러면서 “과거 내연기관차를 만들던 곳에서 지금은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는데,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 모습은 진보하는 형태와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 디자이너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한 디자인 뿐 아니라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 진보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것이고, 생각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시장 필요에 의한 작업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오닉 5의 경우 사용에 대한 새로운 시스템, 이동 수단의 새로운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으로, 놀라운 아키텍처다. 100% 완벽한 건 없지만 모든걸 최선을 다해 만들고 시장의 필요성에 잘 맞추면 경제적인 결과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주지아로와 함께 복원하게 될 현대차의 첫번째 자동차인 포니 쿠페 콘셉트.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이번 주지아로의 방한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상 차원만은 아니다. 현대차는 주지아로와의 협업을 통해 현대차에서 만들었던 첫 자동차 포니 쿠페 콘셉트의 복원 작업을 실시한다. 이 역사적인 자동차가 모터쇼에서 전시된 이후 잘 보존됐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전시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그래서 이번에 주지아로와의 협업을 통해 2023년 포니 쿠페 콘셉트를 부활시킬 예정이다. 이상엽 부사장은 “현대차는 향후 50년을 고민하고 있다. 과거 50년의 출발점이 포니었다면 향후 50년의 출발점은 아이오닉 5이다. 그리고 브랜드의 정신적인 아이콘 포니 쿠페, 그리고 영적인 아버지 주지아로를 통해 향후 50년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지아로는 “이런 대단한 프로젝트를 맡게 됐는데, 요청해주셔서 감사하다. 창조적이라는 것은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여러분의 비전에 만족할 수 있도록 작업할 것이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자동차 디자인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인 조르제토 주지아로, 그가 디자인한 자동차는 그 자체로도 개성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그의 제품이 다른 자동차에도 영향을 줄 만큼 ‘디자인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런 주지아로가 한국 자동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델인 포니 쿠페 콘셉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한국 자동차 디자인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그래서 전 세계 시장에 디자인으로도 1, 2위를 다투는 한국 자동차 산업이 되길 바란다.

 

자동차 디자인의 전설, 조르제토 주지아로

1938년생인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태생부터 주변 환경에 그에게 그림의 길로 가게끔 안내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마리오 주지아로가 종교 그림과 유화 등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 그의 생애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가족들과 함께 토리노로 이사한 조르제토는 낮에는 전문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기술 디자인을 공부하며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동차에 대해 관심을 갖고 디자인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55년 6월, 기술 드로잉 전시회에서 그가 그린 자동차 디자인이 피아트 관계자의 눈에 띄게 되는데,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간파한 피아트 관계자는 재빨리 그를 피아트의 디자인 연구부서에 합류시킨다.

1959 페라리 250 GT 베를리네타 SWB, 주지아로가 21세에 디자인한 것이다

그러나 피아트같은 거대 기업에선 스스로의 성장 속도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주지아로는 피아트를 박차고 나와 1959년 12월 불과 21세의 나이로 베르토네 스타일링 센터의 책임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막중한 자리를 맡기기에 그의 나이는 매우 젊었지만, 디자인 센터를 운영한 누치오 베르토네는 과감한 결정으로 그에게 투자할 것을 결심했고, 그 결과는 탁월한 작업물에서 나온 것들로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주지아로 역시 누치오의 조언과 가르침을 받아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고 회상할 만큼 당시의 경험들은 그의 디자이너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주지아로는 알파로메오 2000/2600 스프린터와 줄리아 GT, BMW 3200 CS, 피아트 850 스파이더 등 다양한 양산차의 디자인은 물론이고 애스턴 마틴 DB4 GT 제트, 마세라티 5000 GT,페라리 250 GT, 알파로메오 캉구로 등 다양한 콘셉트 카의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그 후 주지아로는 베르톤 스타일링 센터에서 독립해 '이탈디자인'을 설립해 2015년까지 운영하다 현재는 자기 이름의 머릿글자를 딴 'GFG 스타일'을 세워 다양한 제품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다.

주지아로와 함께 작업했던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들

국내 브랜드와는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대우 라노스, 레간자, 매그너스, 칼로스 해치백, 라세티 해치백, 쌍용 렉스턴, 코란도 등을 작업한 바 있으며, 해외 브랜드에선 영화 ‘백 투 더 퓨처’로 유명한 DMC의 드로리안, BMW M1, 폭스바겐 골프 등 많은 브랜드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해 이름난 결과물을 선보인 바 있다. 또한 자동차 외에도 니콘 F3 등의 카메라, 기관단총으로 유명한 베레타사의 각종 총기류, 두카티나 스즈키, MV아구스타 등의 모터사이클도 제작한 바 있으며, 열차, 트랙터, 손목시계, 로잔 대성당 오르간 등 다양한 산업 디자인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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