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크기와 장르일 것이다. 크기는 경차부터 소형, 중형, 대형이 있고 그 사이에 속하는 준중형, 준대형 모델도 있다. 장르면에서는 세단과 SUV, MPV 등으로 나뉘는데, 세단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은데다 과거에 비해 가족 구성원 숫자가 크게 줄어든 요즘에는 SUV에 대한 수요가 세단이나 MPV보다 훨씬 높다. 그렇다보니 상황에 따라 대형 세단이 차지하던 플래그십 모델의 지위를 SUV가 누리기도 하는데, 지금 혼다의 상황이 딱 그렇다. 과거엔 대표 모델로 레전드를 꼽았으나 현재 국내는 단종된 상황에서 혼다 플래그십의 자리는 준대형 SUV 파일럿이 지키고 있다. 2012년 국내에 처음 출시된 이후 CR-V와 함께 혼다 SUV 라인업을 지켜온 파일럿이 세대교체를 맞아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제품 판매를 시작했다. 긴 시간동안 명맥을 이어올 수 있는 매력은 무엇이 있는지 시승차를 받아 찬찬히 살펴봤다.

세대가 바뀌며 외관에서부터 큰 변화가 이뤄졌다. 이런 표현이 웃기겠지만, ‘이전 세대는 이전 세대 스타일이었고, 신형은 최근 스타일이다’라는 말이 가장 잘 맞지 않나 싶다. 같은 SUV인 CR-V를 봐도 이전 세대에선 곡선을 중시한 스타일이 전면부를 비롯해 차체 전반에서 느껴졌는데, 파일럿 또한 비슷한 디자인 기조를 이어가며 2012년에 나온 3세대 모델은 이전 세대 CR-V와 닮은 외관을 가졌는데, 이번 4세대 모델 역시 최근에 출시된 CR-V의 스타일과 비슷하게 가며 패밀리룩 디자인을 이어가는 모습이다. 전면부의 각진 헤드라이트와 헥사고날 그릴, 그리고 곡선을 줄이고 직선과 각을 강조한 차체, 후면의 라이트를 레터링이 담긴 블랙 가니시로 이어놓은 점 등에서 CR-V와 매우 닮아있다. 물론 차이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그릴 중앙에 박힌 거대한 혼다 로고라던지, 3열 쿼터 글래스가 도어 가니시가 아닌 C필러로 나뉜 점 등이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차량의 크기는 전장 5,090mm, 전폭 1,995mm, 전고 1,805mm에 휠베이스 2,890mm다.

실내의 변화도 CR-V와 동일한 변화를 보여준다. 대시보드 삽입형 인포테인먼트 스크린이 10.2인치 돌출형 스크린으로 바뀐 부분도 그렇고, 계기판이 일체형으로 구성되었다가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의 디자인으로 바뀐 점도 그렇다. 의외로 변속기는 버튼식이 그대로 유지됐는데, 국내외 브랜드를 통틀어도 이러한 버튼식 변속기에 대한 평이 그리 좋지 않아 CR-V나 어코드와 마찬가지로 다음 부분변경 때는 기존 레버 방식으로 바뀌지 않을까 예상된다. 공조장치 컨트롤러도 익숙한 3개의 다이얼과 물리 버튼으로 구성된 방식이다. 다만 대시보드 구성 디자인에선 차이가 있는데, 지난해 출시된 CR-V나 어코드 신형 모두 송풍구를 비롯한 대시보드 전면을 그물망 같은 형태의 장식으로 덮어 외관과의 일체감을 주는 방식을 택했는데, 파일럿은 장식을 더하거나 하지 않고 각각을 그대로 노출시켜 평범하다는 인상이다. 아무래도 그럴 수 없었던 건 조수석 앞 대시보드에 별도의 수납 공간이 배치되어 있어 적용이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재밌는 점은 뒷좌석이다. 8인승 구성의 차체는 2열과 3열에 각각 3명씩 앉을 수 있도록 시트를 구성해놨는데, 2열의 경우 가운데 등받이를 접어내려 팔걸이로 사용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필요에 따라 가운데 좌석을 탈거하는 것도 가능하다. 뒷좌석에 5명 이하의 카시트가 필요 없는 아이들이 탑승하는 경우라면 승하차를 빠르게 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구성해 이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듯하다. 분리한 시트는 트렁크 바닥면 아래에 적재할 수도 있다. 물론 성인이 타고 내리는 걸 생각한다면 2열 좌우 시트의 등받이를 접는 쪽이 훨씬 낫다. 등받이 어깨 부분에 버튼이 마련되어 있어 이를 사용하면 원터치로 2열 시트를 앞으로 미는 동시에 등받이를 접어 내려 빠르게 승하차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다자녀 가정에도 매력적인 점은 ISOFIX 고정 장치가 2열과 3열 전 좌석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준대형급 SUV라면 넓은 트렁크 공간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최근의 추세에선 2열까지 접어내려 넓은 공간을 확보해 화물 적재나 차박 등에 활용하기에 적합해 이러한 3열 시트가 있는 SUV를 많이 선택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는 파일럿 역시 유행에 잘 들어맞는 모델 중 하나다. 기본 용량은 527L로 적지 않은 편인데, 여기에 3열을 접어 내리면 1,373L, 2열까지 접어내리면 2,464L로 드넓은 공간이 완성된다.

차량 안팎을 살펴봤으니 이제는 직접 달려볼 차례다. 시동을 걸자 V6 3.5L 엔진이 그르릉거리며 깨어난다. 성능은 최고출력 289마력/6,100rpm, 최대토크 36.2kg‧m/5,000rpm을 내는 엔진은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당한 힘으로 차체를 밀어준다. 최근의 SUV들에 비해 수치면에서는 아쉬울 수 있겠지만, 요즘 보기 드문 자연흡기 방식이어서 엔진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와 다루기가 한결 수월하다. 전용도로에 올라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보니 속도가 꽤 시원스럽게 올라간다. 2.1톤 정도의 무게지만 가볍고 경쾌하게 내달리는 모습에 낮은 노면 온도를 잊고 자꾸 페달을 깊숙이 밟게 된다.

패밀리카라는 방향성에 맞춰 승차감은 부드럽다. 앞 맥퍼슨 스트럿, 뒤 멀티링크 구성의 서스펜션 세팅도 그리 단단하지 않아 달리는 내내 노면으로부터의 진동이 느껴지거나 하지 않는다. 변속기도 번속 시점을 알기 어려울만큼 부드러워 순간 CVT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는데, 10단 자동변속기가 채택되어 속도든 연비든 필요한 상황에 맞춰 재빨리 기어 단수를 찾아간다. 여기에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 기술까지 더해지니 3.5L라는 적지 않은 엔진이 탑재되어 있음에도 의식하지 않으면 엔진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을만큼 정숙성까지 갖추고 있다. 

물론 자연흡기 엔진이 반응이 즉각적이어서 좋은 건 모두 잘 알겠지만, 큰 배기량만큼 상대적으로 연비가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파일럿은 복합 8.4km/L, 도심 7,4km/L, 고속 10.0km/L로 배기량 대비 꽤 우수한 연비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엔진에는 i-VTEC의 가변 밸브 리프트와 가변 밸브 타이밍 기술이 적용돼 효율성을 끌어올리며, 상황에 따라 6기통을 전부 사용하지 않고 한쪽 뱅크의 3개 실린더만을 사용하는 가변 실린더 제어 시스템까지 적용됐다. 준대형이라는 덩치에 비해 우수한 연비를 낼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 그리고 10단 자동변속기를 더했으며, 상항에 따라 열거나 닫을 수 있는 셔터 그릴을 장착해 항속 주행에서는 공기저항을 줄이고, 냉각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셔터를 열어 바르게 냉각시킬 수 있다. 또한 사륜구동 시스템인 2세대 i-VTM4 AWD가 적용됐지만 일상적인 주행 상황에서는 앞바퀴만으로 동력을 전달하는 등 여러 기술을 투입해 기대 이상의 높은 연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놀라운 점은 동급에서는 보기 드문 저공해차량 3종 인증을 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로 인해 받게되는 혜택은 공영주차장 50%, 공항주차장 20%가 전부지만 보통 소형이나 준중형급 차량에서나 받는 혜택을 준대형급에서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반가운 일이다. 이런 혜택이 있으면 어딜 가든 주차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가까운 공영주차장에 세워버리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파일럿에도 혼다의 주행 보조 및 안전 기능인 혼다 센싱이 탑재된다. 특히 이번에 기능 작동을 위한 광각 카메라와 광각 레이더를 새로 탑재한 덕분에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이나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은 물론이고, 추돌 경감 제동 시스템, 도로 이탈 경감 시스템, 후측방 경보 시스템 등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됐다고. 또한 트래픽 잼 어시스트 기능과 저속 브레이크 컨트롤은 새로 추가되어 안전성을 더욱 강화했다. 다양한 기능들이 탑재되어 이걸 다 쓰겠냐 싶겠지만, 차체가 큰 만큼 더욱 주의가 필요하고, 시야가 미처 닿지 않는 부분들까지도 놓치지 않도록 보조해줄 수 있는 시스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히 길이가 5m나 넘는 만큼 차선 변경시엔 사이드 미러에 내장된 경고등까지 함께 활용하고 변경 직전에 한 번 더 숄더체크를 통해 사각지대에 놓치는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서 차선을 바꾸는 습관을 들이자. 골목길이나 저속에서 운행중이라면 어라운드 뷰 기능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선 최근 수입 대중 브랜드의 추세에 맞춰 내장 내비게이션을 빼고 안드로이드 오토와 애플 카플레이 기능을 지원한다. 안드로이드 오토로 연결해 내비게이션을 작동해보니 헤드업 디스플레이로도 안내가 이루어져 한결 편하다. 이 밖에도 다른 편의기능으로는 12개 스피커로 이뤄진 보스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이 탑재되어 주행 중 우수한 음질의 사운드를 제공하고, 뒷좌석 탑승자와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캐빈 토크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스마트 기기 사용을 고려해 각 열마다 2개씩의 USB 충전포트가 마련되어 있으며, 운전자를 위한 무선 충전 패드도 변속기 앞 수납함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어라운드 뷰 사용을 위한 카메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카메라 워셔가 설치되어 있어 언제나 깨끗한 화면으로 차량 앞뒤 상황을 살필 수 있으며, 겨울철 사용을 고려한 열선 와이퍼가 적용되어 장기간 주차로 앞유리가 눈에 덮인 상황에서도 빠르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물론 신형 파일럿을 최근의 다른 신제품들과 비교하면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순수전기차나 하이브리드가 아니라는 점도 그렇고, 예전 스타일의 인테리어도 그렇다.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너무 급변하는 최근의 자동차들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괜찮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기능 사용에 있어서도 조작 버튼이나 레버가 예상 위치 주변에 잘 배치되어 있어 별도의 적응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안전 기능이나 편의 사양 역시 부족하지 않게 갖추고 있어 시내부터 교외까지 다양한 상황에 모두 대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내구성으로 정평난 혼다인 만큼 오랜 시간 함께할만한 모델로 꼽기에 이만한 차가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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