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드매거진을 통해 F1 스토리를 연재 중인 김남호 박사는 현재 영국에 거주 중이며, 명문 F1 팀인 Lotus F1 Team에서 성능 분석 엔지니어로 활동 중인 한국인 F1 엔지니어이다. 혹시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지난 연재 기사 링크를 안내한다.

* 김남호의 F1 STORY PART 1 - 더 이상 남의 잔치가 아닌 F1

* 김남호의 F1 STORY PART 2 – interview

* 김남호의 F1 STORY PART 3 – 누가 F1 카를 머신이라 부르라 했던가 

* 김남호의 F1 STORY PART 4 – F1 과 메이드 인 코리아 

F1 스토리 이전 편에서 필자는 기술 공급자로서 한국의 F1 진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그 중 타이어가 F1 수준에 가장 근접 하다고 진단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F1 과의 유기적 연관성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국내 기업의 F1 진출, 특히 한국 자동차 기업의 F1 진출 없이 F1 의 대중화가 매우 어렵다는 점도 짚어 드렸습니다. F1에 대한 관심을 수직 상승 시킬 수 있는 한국인 드라이버 진출은, 사실상 국내 기업의 F1 진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진행될 F1 스토리의 후속 편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뤄질 예정입니다. 


 
매년 코리안 그랑프리가 열릴 무렵이면 유일한 국내 자본 자동차 기업인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이하 현대 기아차)는 국내 자동차/모터스포츠 마니아와 매체들로부터 “국내에서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현실에서도 F1에 참가할 수준도 못 되는 2류 자동차 회사” 라는 식의 비난을 받습니다. 사실 한국차가 놀라운 속도로 진화를 거듭해 왔다고는 하지만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여전히 유럽, 일본 차 다음의 서브 클라스를 점유하고 있고,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국내에서의 시장 점유율도 차량 유지의 경제성 측면을 배제하면 국내 소비자들의 브랜드 선호도나 신뢰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 옛날 계급 사회에서 신분 상승이 지독히도 어려웠던 것처럼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2류, 하위 클라스”라는 굴레를 벗어나려는 국산 자동차의 노력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효과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시장 정서가 국산 자동차에 유리하지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유럽의 대표적 자동차 메이커들이나 일본의 혼다, 토요타는 이미 오래 전에 F1 에 진출한 경험이 있으며 이중 일부 자동차 메이커의 F1 참여는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반면 한국 자동차 메이커들은 몇몇 국제 랠리 대회에 간헐적인 스폰서십과 참가가 있었을 뿐 아직까지 F1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터스포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의 설명에서 랠리란 경쟁 차량들이 정해진 도로나 비포장 구간을 단독으로 주파한 시간을 기준으로 승리를 가리는 모터스포츠의 한 형태이며, 모든 경쟁 차량들이 출발선을 동시에 출발하여 물리적 순위를 경쟁하는 레이스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메르세데스나 혼다에게는 있으나 현대 기아차에서는 분명하게 찾아볼 수 없는 이 X-Factor. 자동차는 매우 값 비싼 제품이기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국내외 자동차 소비자들은 당연히 F1 참가 능력을 자동차 제작 기술력으로 치환하여 생각할 수 있고, 그 결과 국산 자동차 메이커들은 실제 기술력이나 품질과는 무관하게 저가, 저 품질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현실에서도 F1 에 참가할 수준도 못 되는 2류 자동차 회사”라는 비난은 어찌 보면 국산 자동차를 바라보는 이 두 가지 시선을 모두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 기아차는 이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일까요? 그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이런 식의 공격은 F1 이란 스포츠이자 산업의 생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비난입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첼시 팀의 유니폼에 Samsung 로고가 붙어 있다 해서 삼성이라는 기업이 첼시 구단의 선수 구성과 훈련, 경영을 책임진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4년 연속 F1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한 레드불 F1 팀은 음료수를 만들어 팔던 레드불의 마테쉬츠 회장이 어느 날 아침 “그래 이젠 레이싱카를 만들 차례야” 라며 대오 각성하여 공장 부지를 사고 건물을 짓고, 엔지니어들을 고용하여 자동차 공장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이 팀은 레드불이란 이름이 붙여지기 전 재규어라는 이름으로, 그 이전에는 또 다른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F1 팀입니다.



레드불이라는 음료수 회사는 애초에 제품 광고를 목적으로 타이틀 스폰서로서 F1 에 진입하였지만, F1의 우수한 시장성을 예견하고 이 팀의 지분을 사들여 회사를 인수한 투자자입니다. 모든 F1 팀은 독립적인 엔지니어링 회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들은 많게는 70여 년 전부터 조그마한 웨어 하우스에서 레이스카를 만들기 시작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기술을 축적하고 엔지니어들을 양성하고 투자를 유치하여 현재의 규모로 성장한 어엿한 자동차 회사들입니다.



F1 팀들은 타이틀 스폰서십이나 지분 투자를 받아 그들의 이름으로 경쟁하고 성장합니다. 르노 닛산의 고급 브랜드 “인피니티”가 현재 레드불 F1 팀을 스폰서한다고 해서 인피니티의 제작 기술이 레드불 F1 카에 직접적으로 이식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사진은 현재 Mercedes-Benz F1 팀 자동차의 4 년 전 모습입니다. 한 눈에 보더라도 뭔가 많이 허전합니다. “실버 애로우” 메르세데스의 힌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2008년 경제 위기가 닥치자 수십 년간 F1 에 투자해 오던 혼다가 갑자기 F1 포기 선언을 하고 철수해 버립니다. Honda는 100%였던 지분을 모두를 현재까지 메르세데스 F1 팀의 사장인 당시 사장에게 헐값으로 넘기고 손을 텁니다. 하지만 말씀 드린 대로 혼다가 떠났다고 해서 팀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이틀 스폰서를 잃은 이 팀은 차에서 붙일 변변한 스티커가 없었고 그 결과 이 팀의 레이스 카는 위 사진처럼 휑한 백지 상태가 되었습니다.



2009 시즌 시작까지도 타이틀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이 팀은 당시 사장의 이름을 따서 Brawn GP 라는 팀 이름, 그리고 프라이머 (밑 바탕) 도색만 마친 듯한 화이트 컬러의 차로 2009년 시즌에 참가합니다. 하지만 2009 년 Brawn GP의 차는 기술 규정의 허점을 이용한 트릭으로 다른 차들보다 월등하게 빨랐고 시즌 중반에 이미 월드 챔피언을 확정 지었습니다. 그러자 사실상 망해가던 이 팀에 기적처럼 다시 스폰서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두 번째 사진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시즌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0 년, Mercedes-Benz라는 거대 자동차 회사에 인수되어 현재까지 메르세데스라는 이름으로 트랙을 달리고 있습니다. 메르세데스는 현재 이 팀의 투자자 이자 테크니컬 파트너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이 팀의 DNA에는 메르세데스가 없습니다. 불과 12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혼다라는 팀 이름으로 5 년 간 달렸고 혼다에 의해 100 % 개발된 이 차는 혼다의 철수 결정으로 하루 아침에 밋밋한 Brawn GP 가 되었다가, 다시 일 년만에 메르세데스를 대표하는 실버톤과 세계적인 거대 기업의 스티커로 장식되었습니다. 만약 혼다가 1년 만 더 참았더라면 혼다는 꿈에 그리던 월드 챔피언십과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거머쥐었을 것이고 이 팀은 아직까지 혼다 F1 팀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 한국은 F1 에 이미 진출해 있습니다. 현재 LG는 수년간 F1의 공식 후원사로 활동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미 20년 전에 F1 진출을 노렸던 한국 기업이 있었습니다. 독자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이 기업은 한 두 해도 아니고 무려 14 년 동안 F1 팀에 투자를 하였습니다. 그 투자자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는 한진 해운 조수호 회장입니다. 조 회장은 F1 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조 회장은 1994년 급기야 대한항공과 한진 그룹 이름으로 Simtek F1 팀을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팀의 성적이 부진하자 1995 년 Tyrell F1 팀으로 후원을 변경합니다.



1997년부터는 Benetton F1 팀을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베네통 F1 카의 Korean Air 로고는 페라리의 말보로 로고만큼 유명한 아이콘입니다.
 

2001년부터는 Renault F1 팀을 후원하였습니다. 이 차에도 HANJIN 로고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조 회장은 2007년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F1에서 손을 뗍니다. 조 회장의 F1에 대한 관심이 식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2006년 52세의 이른 나이에 별세했기 때문입니다.



F1 팀을 스폰서 하는 것과 F1 진출은 다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혼다와 토요타도 스폰서로서 F1 진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한국인에게 F1이란 이름조차 생소하던 시절, 조 회장은 무려 11 년 동안 F1 팀을 후원했고, 사실상 이 F1 팀의 VIP 투자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가 속한 Lotus F1 팀은 제가 팀에 합류할 당시, 조 회장이 후원하였던 바로 그 Renault F1 팀이었습니다.
 

Renault F1 팀의 Enstone 헤드쿼터는 2001년까지 Benetton F1이라는 팀이 사용하였습니다. 감이 오시나요? 그렇습니다. 조 회장이 무려 10 년 넘게 후원하였던 Benetton과 Renault 팀은 Toleman부터 Lotus까지 21년 동안 명칭만 바뀌었지 모두 같은 팀입니다. 조 회장은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줄 곳 오직 한 팀만을 후원한 것입니다. 조 회장은 11년간 현 로터스 팀의 메인 스폰서였으며 실질적인 투자자였습니다. 조 회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2007년 Renault F1 팀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한진을 위한 헌정카를 제작해 말레이시안 그랑프리에 참가하였습니다. 아마도 조 회장이 살아 있었더라면 현재의 로터스 F1 팀은 한진 F1 팀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처음의 논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현대 기아차는 “국내에서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현실에서도 F1에 참가할 수준도 못 되는 2류 자동차 회사”라는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한국 식품회사에게 “국내에서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현실에서도 F1에 참가할 수준도 못 되는 2류 식품 회사”라고 비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판의 초점을 조금만 이동 시키면 현대 기아차를 향한 비판은 유효해 집니다. “국내에서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F1 투자에 인색한 거대 자동차 회사”. 이것이 현대 기아차가 비판 받아도 마땅한 이유입니다. 세계 시장을 가열차게 두드리고 있는 현대 기아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고 자동차로 인정받기 위한 통과 의례라고도 할만한 F1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한국 기업의 F1 진출 방법은 문자 그대로 한국 F1 팀을 무에서 창조하는 것입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이를 위한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용과 시간이 얼마나 투입되어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비 효율성이라는 위험 요소가 따릅니다. 2010 년 맨 바닥에서 시작하려 했던 미국의 US F1 프로젝트가 차체 제작도 못 끝낸 상태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린 사례는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이렇듯 F1 팀은 하루아침에 이룩될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한국 기업들은 우선 스폰서십이라는 형태로 F1과의 거리를 좁혀가야 합니다. 그 주체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후 점차적으로 F1 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궁극적으로 메르세데스, 르노, 혼다와 같이 엔진까지 공급하여 순수 기술력을 인정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인정하기 싫지만 자동차 시장에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 제도”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 기아차는 톱 클라스 모터스포츠에 투자를 서둘러야 합니다. 때문에 이번 현대차의 WRC 출전 결정은 매우 의미있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터 스포츠에 대한 투자가 단발성 이벤트로 그치지 않길 바랍니다. 만년 하위팀이었던 레드불 F1 팀이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모회사 레드불은 밑 빠진 독에 물 붇듯 투자하며 무려 7 년을 기다렸습니다. 일본의 혼다, 토요타 또한 수십년 간 꾸준히 여러 모터 스포츠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10 년 전 껍데기만 현대 액센트인 차로 참가했던 WRC 에서 쓴맛을 본 후 첫술에 배가 부르지 않음을 탓하듯 조용히 짐을 싸서 돌아왔던 모습을 이번에도 되풀이 한다면, 현대 기아차의 모터 스포츠 투자에 대한 인식 자체가 의심 받게 될 것입니다. 모터 스포츠를 단순히 즐기는 것은 돈 낭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터 스포츠에 대한 자동차 기업의 투자는 R&D 투자로 보아야 합니다. 모터 스포츠를 통한 R&D 확대는 국내외 소비자들로 하여금  국산차에 대한 냉소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 아마도 모터쇼를 통한 Showing-Off 만으로 국산 차에 대한 전 세계 소비자들의 색안경을 벗기기란 여간 해서는 쉽지 않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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