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자전거와 메이커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몰튼 바이시클’은 무척 독특하면서 매력적인 자전거를 만들어내는 메이커 중 하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자전거들이 주로 레이스에서의 활약을 통해 그 이름을 빛냈지만, 몰튼 바이시클의 자전거들은 디자인과 기능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몰튼 바이시클의 창립자 알렉스 몰튼(Alex Moulton, 1920-2012) 박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몰튼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기간동안 항공기 제조사인 브리스톨 에어로스페이스 컴퍼니에서 총괄 엔지니어 로이 페든경의 개인조수로 경험을 쌓았으며, 전후 몰튼 디벨롭먼트 컴퍼니라는 회사를 세운다.
알렉 이시고니스의 미니 스케치와 미니 서스펜션 분해도 몰튼 박사의 회사가 개발한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는 영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중 하나인 로버 미니에 장착된 서스펜션이었다. 미니는 작은 크기의 자동차에 최대한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초소형 서스펜션이 장착되었는데, 이 서스펜션의 특징은 바로 고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고무 스프링은 강철 스프링보다 부피가 작고 가벼우면서도 충격을 효과적으로 흡수했고 여기에 댐퍼가 더해진 ‘하이드로라스틱’ 서스펜션이 1,200만 대 이상의 자동차에 장착된다.
이렇게 알렉스 몰튼 박사는 자동차 엔지니어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전거에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 영국은 배를 통해 원유를 수입하였는데,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면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전쟁을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석유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 영국은 휘발유 배급제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석유를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거의 마비되기에 이른다. 몰튼 박사는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을 대체할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떠올렸고, 보다 효율적이고 편안한 새로운 개념의 자전거를 구상하게 된다.
몰튼 F 프레임의 탄생
몰튼 스탠더드 M1 당시의 자전거들은 지금과 같이 다양한 형태와 모양을 갖춘 것이 아닌, 큰 바퀴와 무거운 프레임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몰튼 박사는 무게를 줄이고, 복잡한 도심에서 보다 민첩하고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들기 위해 ‘작은 바퀴’를 장착한 자전거를 구상했다.
하지만 작은 바퀴를 장착한 자전거는 큰 바퀴를 단 자전거가 부드럽게 넘어갈만한 작은 요철에도 쉽게 튀어 올라 승차감이 나쁘고, 탑승자가 금방 피곤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몰튼 박사는 여기에 자신이 개발한 고무 서스펜션을 장착한다. 이렇게 몰튼 바이시클의 첫 자전거가 탄생한다. 이 자전거는 1962년 런던 얼즈코트 자전거 박람회에 전시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자전거의 프레임은 알파벳 F자를 닮았기 때문에 ‘F 프레임’이라고 불리었다. 뒷바퀴의 스윙암과 당시의 모터사이클에 적용된 것을 간략화 한 형태의 서스펜션 포크에는 고무 서스펜션이 장착되었고, 실용적인 큰 짐받이를 달았다. 몰튼 바이시클의 F 프레임 모델은 서스펜션의 효과와 더불어 무게중심이 낮은 특징 때문에 안정적이며 민첩한 주행성능을 보여주었다. 이 F프레임 모델은 무려 15만대가 판매되었고, 몰튼 바이시클은 당시 영국에서 2번째로 큰 자전거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스페이스 프레임의 ‘알렉스 몰튼’
알렉스 몰튼 박사가 원래 자동차 엔지니어였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당시의 경주용차나 고성능 스포츠카의 섀시에는 ‘스페이스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스페이스 프레임 구조는 가볍고 견고하지만 생산비용이 높고 제작이 까다롭다.
메르세데스-벤츠 300SL의 스페이스 프레임 섀시 알렉스 몰튼 박사가 이러한 스페이스 프레임의 가능성을 몰랐을 리 없다. 몰튼 바이시클은 1979년 또 다른 자전거를 세상에 내놓는데 바로 박사 자신의 이름을 붙인 ‘AM(알렉스 몰튼)’ 시리즈다. 이 AM 시리즈의 프레임은 스페이스 프레임 구조를 적용한 아마도 최초의 자전거일 것이다.
스페이스 프레임은 삼각형이 모여 공간을 만들어내는 트러스 구조로 이루어진다. 트러스 구조는 사실 건축학에서 비롯된 것인데, 파리의 에펠탑이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AM 시리즈의 스페이스 프레임은 가볍고 강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능적 구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통해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AM시리즈 이후 고무 서스펜션과 스페이스 프레임은 몰튼 바이시클이 만든 자전거의 특징으로 자리 잡으며, 스페이스 프레임의 구조 또한 조금씩 개량이 이루어진다. 또한 몰튼 바이시클의 자전거 생산도 변화를 맞이한다. 몰튼 바이시클의 자전거들은 1967년부터 1974년까지 라레이(Rareigh) 사를 통해 위탁 생산하였는데, 1975년부터 대량생산을 포기하고 몰튼 바이시클의 자전거들은 수작업을 통해 완성되는 고가의 프리미엄 모델을 지향하게 된다. 1983년에는 알렉스 몰튼 박사의 성인 ‘더 홀’에 자전거 공장을 세워 AM시리즈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한다.
몰튼 바이시클의 AM 시리즈는 다양한 기록에 도전하며 그 명성을 높였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1986년 사이클 선수 짐 글로버가 AM시리즈를 타고 세운 평지 자전거 속도기록이다. 짐 글로버의 자전거는 AM시리즈에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한 유선형 페어링을 씌운 것으로, 최고속도 시속 82.5km/h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는 기네스 월드레코드가 인정한 가장 빠른 자전거 속도기록으로 지금까지 깨지지 않았다.
NS 더블 파일론 2000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구조와 서스펜션을 적용한 ‘NS(뉴 시리즈)’ 모델이 등장한다. NS 모델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파일론’이라는 구조물이다. 기존의 AM시리즈에는 조향부를 비롯한 프레임의 일부분에 두꺼운 원형 튜브가 사용되었는데, '더블 파일론‘ 모델의 경우 프레임 전체가 가느다란 튜브를 용접해서 만든 트러스 구조로만 이루어졌다. 또 포크의 서스펜션은 마치 자동차의 더블위시본 구조를 닮은 형태로 바뀌었다.
NS 더블파일론의 프레임 사실 자전거의 성능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무겁고 복잡한 형태로의 변화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NS 더블파일론 모델의 디자인에 열광한다.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트러스 프레임과 정교한 기계미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것, 이것이 NS 더블파일론 모델의 매력 아닐까.
AM 스피드 더블파일론을 비롯한 NS 모델들은 생산이 까다롭고 영국에서 수공으로 만들어지는 자전거임을 감안해도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튼 바이시클의 NS 모델은 주문 후 수 개월을 기다려야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다. 마치 주문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받아볼 수 있는 커스텀메이드 자동차처럼 말이다.
TSR 9 몰튼 바이시클의 AM 시리즈와 NS 모델은 지금도 영국 몰튼 성에서 전량 수공으로 제작된다. 그러나 양산형 모델이라 할 수 있는 TSR 시리즈를 통해 좀 더 쉽게 몰튼 바이시클을 만나볼 수 있다. TSR 시리즈는 AM시리즈의 프레임과 서스펜션을 기초로 보다 양산에 적합한 형태로 바꾼 것으로, 영국의 자전거 메이커 파슐리사를 통해 생산한다.
브리지스톤 몰튼 또한 몰튼의 초기형태인 F프레임 모델도 2000년부터 일본 브리지스톤사를 통해 복각되어 ‘브리지스톤 몰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는 오리지널 F프레임을 베이스로 현대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모델이다. 브리지스톤 몰튼은 비록 일본에서 생산된 모델이지만, 단순히 라이선스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브리지스톤 몰튼의 개량작업에는 알렉스 몰튼 박사가 직접 참여함으로서 그의 자랑스러운 자식 중 하나로 몰튼 바이시클의 계보를 잇는다.
몰튼 바이시클의 아버지 알렉스 몰튼 박사는 지난 2012년 12월 9일, 9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몰튼 바이시클의 시계는 멈춘 것이 아니다. 지난 2000년 NS의 공개 이후 첫 신모델을 올해 발표했으며, 클래식 모델을 계승하는 새로운 프로토타입 트랙 모델을 공개하기도 했다. 몰튼 바이시클이 달려온 지난 52년간은 자전거의 역사에 빛나는 혁신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글 장낙규 기자
제공 라이드매거진(ride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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