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편 네이버 링크 : 혼다 CBR 시리즈 개발자 인터뷰 에피소드

 

 

1992년 당시 엔진 파워를 최고로 여기는 배기량 지상주의를 깨뜨린 주역 CBR 스포츠 바이크 시리즈. 슈퍼스포츠가 가진 본연의 자세에서 탄생한 CBR900RR은 ‘모두가 쉽고 적극적으로 모터사이클을 조종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최대 목표였다.

 

 

당초에 750cc 클래스도 1000cc 클래스도 아닌 어중간한 숫자, 900을 앞세워 소개되는 것이 두려웠던 유럽에서는 배기량을 숨긴 ‘FireBlade’라는 명칭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루기 편하고 근본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스포츠 바이크의 의미를 읽은 사람들이 이 모델을 칭찬하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눈치를 보던 유럽시장에서도 ‘CBR900RR’의 명칭을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빠르고 강력하며 아무나 타기 힘든 슈퍼스포츠 바이크의 가치관을 CBR900RR이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등장한 5대째 CBR은 CBR929RR이다. 배기량을 확대하고 퓨엘 인젝션을 채용한 신개발 엔진을 실어 구성 요소의 대부분에 첨단 신기술이 접목한 풀 체인지 모델이었다.

 

미야기 : 초대 CBR900RR은 전 세계에 모터사이클 마니아들에게 큰 충격을 줄 정도로 가볍고 콤팩트하게 만들어졌었죠.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후의 모델 체인지로 해마다 조금 더 파워풀하게, 그리고 더 가벼워지고 있었어요.

 

 

7대째 CBR1000RR 개발 책임자 히로후미 후쿠나가 : 3대째는 배기 파이프를 스테인리스로 바꾸고 연료 펌프를 수정해 1킬로그램을 감소했죠. 4대째에서는 전체 부품을 80퍼센트 이상 다시 설계해 약 3킬로그램 정도를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라이벌의 등장에 맞추어 1,000cc로 완전히 배기량을 올려버리는 것도 검토했지만 그렇게 할 경우 당시 기술로는 10킬로그램 정도 무거워 져 버리는 것을 감당해야만 했어요. 고민해봤지만 당시로써는 파워의 향상에 따른 이점보다 무게가 늘어나게 된다는 단점이 더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미야기 : 풀 모델 체인지 되는 5대째의 콘셉트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차체 설계 담당 토시 히사 : 그건 전혀 변하지 않는 부분이죠. 라이더에게 ‘조종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는 것이죠. 더불어 기본적으로는 ‘스즈카 8시간 내구 레이스에서 현역 레이서인 RVF750에 이길 수 있는 성능’이라는 목표를 세운 것도 초대와 접근 방식 면에서 동일합니다. 그 단계에서 조금이라도 가볍고 콤팩트하게 설계하는 것이 다음 목표였죠. 하나하나 성실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설계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당시 각 부품의 중량을 계산하는 것은 내가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계산해보니 모든 부품을 따로 모아서 잰 무게와 전부다 조립한 후에 잰 것은 500그램 정도가 달랐습니다. 그 사실을 개발 책임자인 바바 씨에게 보고했더니 "바보 같은 놈!“이라고 혼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지만 차체 중량으로 계산하면 전체의 0.5퍼센트에 불과한걸요?”라고 반박했더니 "0.5퍼센트도 소중하다“라며 화를 내셨어요. 그 정도로 무게에 대한 부분은 아주 엄격하게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미야기 : 500그램이라면 인간의 체중으로 환산해도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마시지 않은 정도의 차이군요(웃음). 그 정도 집착이라면 페인팅 후에 붙는 데칼 1장의 무게도 걱정스러울 정도인데요.

 

9대째 CBR1000RR 디자이너 토시아키 키시 : 그렇죠. 어떻게 하면 페인트를 덧칠하지 않고도 혼다의 삼색 컬러(붉은색/푸른색/흰색의 트리컬러)를 표현할 수 있는지도 고민했으니까요. 페인트의 무게와 데칼의 무게를 두고 말입니다.

 

미야기 : 아니, 레이싱 머신도 아니고 양산형 판매차를 가지고도 그런 고민을 했단 말입니까? 집착에 가깝네요.

 

 

키시 : 그럼요. 그 뿐 아니라 무게에 대한 섬세한 고민들은 훨씬 많았습니다. 하지만 경량화와 모델 콘셉트를 놓고 부딪치기도 했지요. 음... 예를 들면 여태 개발해 왔던 CBR900RR 시리즈와 같이 심하게 경량화를 추구한 CBR954RR 모델 또한 동승자용 시트가 힌지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요. 저는 이 부분을 남겨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램 단위로 경량화를 추구하고 데칼 스티커 한 장을 붙이는 것도 아쉬워하는 마당에, 제가 생각하기에 무거운 경첩 설계는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죠.

 

 

그래서 바바 씨에게 “동승자용 시트를 굳이 여닫이 식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만 없애도 무게가 줄어들텐데요”라고 진중하게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CBR900RR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 이것은 CBR900RR이 가진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다"라며 또 혼만 났습니다.(웃음)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금방 이유를 깨닫게 됐죠. 한번은 바바 씨와 함께 CBR900RR 투어링에 ​​가면서 일기 예보가 좋지 않은 것 같아 뒷좌석 아래에 비옷을 넣어갔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나도 모르게 마치 자동차 트렁크처럼 투어링 중 대부분의 물건을 무의식적으로 시트 아래 넣고 있던 것이죠. 투어링 내내 아무렇지 않게 지갑을 그 곳에 넣고 빼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경첩으로 열고 닫는 시트가 굉장히 편리하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더군요.

 

 

이건 정말 사소한 부분일지 몰라도 사용자가 느끼기에는 아주 훌륭한 장점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다지 대단한 설계는 아닐지라도, 이 바이크가 일반 도로에서 달리는 슈퍼스포츠 바이크를 대표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작은 부분들이 모여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대째 CBR900RR (CBR929RR)의 차체 중량은 배기 파이프에 가벼운 티타늄 소재를 채용하는 등 당시로써 대담한 기술뿐만 아니라 그램 단위로 부품의 경량화를 추진한 개발진의 집착과도 같은 노력을 통해 초대 모델에 비해 총 15킬로그램 상당의 중량 감소를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2년 후에 데뷔시킨 2002년 모델(CBR954RR)은 추가로 2킬로그램을 더 경량화 해냈다. 하지만 개발진이 고집한 것은 그러한 카탈로그 스펙의 가벼움에 머물지 않았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운전자가 탑승하고 달렸을 때 그만큼 가벼운 느낌을 충분히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미야기 : 이 모델의 특징은 스윙암을 메인 프레임에서 분리시키는 피벗리스 프레임이었습니다. 이 설계를 CBR에 도입한 이유가 뭡니까?

 

5대째 CBR900RR (CBR929RR) LPL 대행 하세가와 켄지 : 해마다 파워가 향상하고 있고 그에 대한 안정성도 강화해야만 했어요. 해결책은 당연히 섀시의 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하지만 레이스라면 몰라도 일반 도로에서 타는 바이크를 너무 높은 강성으로 설정하는 것은 오히려 타기가 어려워지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될 뿐이란 말이죠. 예를 들어 작은 움직임에도 지나치게 거동이 민감해 쓸데없이 운전자가 피곤해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하기에 어렵지 않겠어요?

 

 

미야기 : 그것도 맞는 말이죠. 그래서 새로운 설계를 고안해 본 건가요?

 

하세가와 : 네. 그래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다른 방법으로 스윙암을 메인 프레임이 아닌 크랭크 케이스에 장착하고 연결하는 피벗리스 프레임 구조를 도입하려고 생각했죠. 바바 씨는 ‘미꾸라지’같다고 했지만 분명 효용성은 충분했습니다. 적당한 유연성을 발휘해 뒷 축을 안정적으로 잡아줄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죠.

 

 

피벗리스 프레임 덕에 강성을 함부로 늘리지 않고 슈퍼스포츠 바이크에 필요한 조종 안정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실제 무게보다도 가볍게 느껴지는 승차감을 구현하는 것, 그런 지향점에 상당히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이 설계는 5대째에 처음 적용하고 결과가 좋아 그 다음 2002년 모델인 CBR954RR에도 사용했습니다.

 

미야기 : 음... 해마다 성능이 향상하긴 했지만 그것을 즐길 무대는 어디까지나 일반 도로라는 CBR의 기본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시도였던 것 같네요.

 

 

600cc 클래스의 가벼운 차체에 고출력 엔진을 비롯한 강력한 하드웨어 구성은 이제 CBR시리즈만의 전매특허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쟁자가 여럿 생겼다. 그런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받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첫 시도는 혼다가 자행했지만 새로운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 한 것으로 태어난 각 메이커별 슈퍼스포츠 바이크들이 속속 데뷔함에 따라, 전에 할 것 없이 경쟁자가 많아진 사실은 혼다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설계 디자이너에게도 많은 자극을 주고 있었다.

 

 

미야기 : 방금 전 데칼 한 장의 무게까지도 고민해 경량화를 진행했다고 했는데요, 아무래도 이런 변화는 2000년 이전 모델에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무리 경량화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그 정도로 집착하지는 않았었잖아요?

 

키시 : 솔직히 말하면... 타 메이커의 강력한 라이벌 출현에 자극을 받았다는 부분을 빼놓기 어렵겠죠.

 

미야기 : 하긴 그렇죠. 당시만 해도 CBR900RR의 성공에 이어 국내 각 메이커로부터 잇따라 슈퍼스포츠 바이크가 새롭게 출시되는 시점이었으니까요.

 

 

키시 : 물론 초대부터 이어 온 CBR900RR의 디자인은 경량, 콤팩트, 질량 집중이라는 하드웨어의 특징과, 거기에서 얻어지는 간단한 조작성을 갖춘 즐거움을 순수하게 표현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감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다만 거기서 안주할 수 없었죠. 제시는 우리가 했다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는 디자인과 성능으로 어필해 오는 경쟁사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나왔으니까요. 우리도 나름대로 풀 체인지 모델에 대해 디자인의 진화를 감행해야만 했습니다.

 

 

미야기 : 그래도 CBR900RR이 등장함으로써 경쟁의 불씨를 새롭게 불태웠다는 것 아닌가요? 이건 우리 같은 사용자들에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렇게 진화하는 바이크를 탈 수 있게 되니까요.

 

키시 : 지금까지 해 온 디자인 기법으로는 엔진이나 프레임 등의 골격 부분과 페어링, 탱크 등 외장 부분이 각각의 디자인으로 설계된 후에 조립단계에서 결합하는 형태였는데요. 이런 설계 방식은 각각의 하드웨어로는 최첨단을 자랑하지만 전체의 디자인 기법으로는 비교적 고전적인 형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CBR929RR를 개발하는 단계에서는 ‘각 파츠와 외장 디자인의 융합’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했습니다. 각각의 기능을 다하는 한계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효과를 얻겠다는 것이죠. 외부 카울의 형상만으로 라이더의 거주성을 희생하지 않고 방풍성능을 최대화할 수도 있고요. 이런 부분들이 모여 경량화, 콤팩트화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기도 했죠.

 

미야기 : 그렇군요. 2000년도 이후에 나온 모델들은 확실히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어요. 샤프한 디자인으로 급하게 바뀐 것도 그런 기술이 바탕 되었다는 이야기군요. 기능적인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된 시점이 이 때라고 볼 수 있겠네요.

 

 

데뷔 이후 최초의 풀​​ 모델 체인지가 된 5대째 CBR900RR (CBR929RR)은 2년 뒤인 2002년, 많은 신기술을 도입한 디자인 콘셉트와 954cc까지 배기량을 확대한 엔진을 탑재해 한 6대째 CBR900RR (CBR954RR)까지 이어졌다. 단 2년 만에 겪은 변화치고는 다양한 부분에서 파격적으로 진화했지만, 20년간의 CBR 역사에 남긴 점은 무척 큰 것이었다.

 

키시 : CBR929RR만 해도 도립식 포크와 피벗리스 프레임을 채용했고 엔진의 배기량도 올라갔죠. 디자인도 완전히 새로워졌고요. 자칫하면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방향이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초기 콘셉트를 잃지 않고 최대한 경량화 콤팩트화를 해냈다는 성취감도 무척 컸어요.(웃음)

 

 

하세가와 : 사실, 레이스에 대해 전혀 대응하지 않는다는 접근법으로 ‘도로에서 즐기는 슈퍼스포츠’를 만든 것은 6대째인 CBR954RR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모델은 월드 슈퍼 바이크 챔피언십에 참전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물론 2004년 모델에서도 지금까지 쌓아온 ‘CBR 다움’을 원칙으로 했습니다만 모터사이클 개발 기술은 확실히 바뀌었고, 콘셉트도 레이스 지향 머신으로 바뀌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모델을 통틀어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CBR을 개발하던 중에 뭔가 갈피를 잃었을 때 ‘무엇이 무거운 느낌이고 가벼운 느낌인건가’, 혹은 ‘도로에서 탔을 때 일반 라이더가 정말 가볍다고 느껴지는 건 어떤 거지?’, ‘스포츠하는 것, 조종하는 기쁨을 느끼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지?’ 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 던지면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훗날에는 그러한 질문들이 사용자들이 우리 바이크를 평가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죠.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제공 : 임성진 기자 / 라이드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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