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통 있는 자동차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헤리티지(heritage)’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유산’ 정도에 해당하는 단어인데, 한 자동차 메이커가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기술과 디자인, 업적, 역사, 문화를 통틀어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을 찾기는 어려울 듯하다.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엄청난 성능의 스포츠카를 만들어내는 메이커를 가리켜 간혹 ‘UFO를 주워왔다’는 식으로 재미있게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자동차 메이커도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기술과 노하우를 결집한 작품을 내놓았을 때 비로소 세상을 놀라게 할 자동차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차를 만들어내는 메이커를 가리켜 우리는 경외심을 담아 ‘전설’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포르쉐처럼 말이다.

 

좌 :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 / 우 : Type 30 Käfer 프로토타입 (1937)

 

포르쉐는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 1875-1951) 박사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1948년 설립되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라는 이름은 폭스바겐의 역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는 1938년 등장한 이래 독일의 국민차로 불리며,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은 폭스바겐 ‘비틀’의 아버지가 바로 페르디난트 포르쉐이기 때문이다.

 

 

폭스바겐 비틀은 국민차를 개발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설계되었다. 포르쉐 박사에게 제시된 국민차의 조건은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이 탈 수 있고, 1리터의 휘발유로 10km/h를 달릴 수 있고, 무게는 660kg 이하이며, 고장이 잘 나지 않고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으니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었던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간동안 독일군이 사용한 다용도차 퀴벨바겐(KÜBELWAGEN)

 

그러나 포르쉐 박사는 단순함과 실용성을 모두 갖추고, 수평대향 엔진을 장착한 후륜구동차 Kdf를 1936년 개발 완료한다. 1938년 만들어진 Kdf 타입1이라 불린 민간용 모델은 폭스바겐 비틀의 원형이 되었지만 실제 대량생산은 1945년 이후 이루어진다. 구조가 단순하고 튼튼했던 Kdf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전쟁기간동안 독일군이 널리 사용했던 다용도 군용차량인 퀴벨바겐과 쉬빔바겐으로 개량 생산되었다.

 

포르쉐 박사가 개발한 경량 스포츠카 Typ64 (1939)

 

포르쉐 박사는 포르쉐의 창립 전 이미 소형 경량 레이스카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를 포르쉐 브랜드 탄생의 기원으로 볼 수는 없지만, 포르쉐의 첫 양산 스포츠카 모델인 356의 개발 토대에 폭스바겐 비틀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포르쉐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을 위해 당시 최강의 전차중 하나로 불리었던 티이거의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종전 후 전범으로 몰려 프랑스에서 체포되었고, 1급 전범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2년간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포르쉐 박사는 1947년 막대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 장남인 페르디난트 안톤 에른스튼 포르쉐(Ferdinand Anton Ernst Porsche : 1909-1998)와 함께 1947년부터 스포츠카 제작에 뛰어든다.

 

 

페르디난트 안톤 포르쉐는 포르쉐 박사가 독일 스투트가르트에 포르쉐 디자인 사무실을 열었을 무렵부터 함께 일을 해온, 포르쉐의 첫 직원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인 포르쉐 박사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페리 포르쉐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1932년부터 포르쉐가 개발한 자동차의 테스트 모니터링, 클라이언트 관리 등 업무 전반을 총괄했다. 페리 포르쉐는 포르쉐가 독립적인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포르쉐 356 로드스터 (1948)

 

1948년 등장한 포르쉐의 첫 2인승 스포츠카 ‘356’은 페리 포르쉐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이 모델은 낮은 공기저항을 위한 유선형의 차체가 특징이며, 우수한 승차감과 뛰어난 도로 주행 성능, 스포츠카로서의 매력적인 스타일을 모두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에서 언급했듯 356은 폭스바겐 비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치 비틀을 좀 더 매끈하게 다듬고 납작하게 눌러놓은 듯한 차체 디자인만 보아도 이 두 모델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로 포르쉐 356은 생산 초기 폭스바겐의 1.3L(1131cc) 공랭식 수평대향 4기통 엔진과 트랜스미션, 서스펜션 등의 부품을 공유하기도 했다. 엔진은 차체 뒤쪽에 탑재되었고, 뒷바퀴 굴림 방식을 채택했다.

 

포르쉐 356 쿠페 ‘페르디난트’ (1950)

 

356은 쿠페와 카브리올레, 스피드스터 등 다양한 모델이 출시되었고, A~C타입으로 개량을 거듭하며 1965년까지 약 77,000대 정도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356은 성공적인 모델이었지만, 세월의 변화에 따라 점차 낡은 모델로 인식되었다. 포르쉐의 경영진은 보다 세련되고 강력한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운 스포츠카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356 후속모델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당시 4인승 스포츠카로 계획되었고 695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당시 포르쉐를 이끌었던 페리 포르쉐가 후방에 보조석이 있는 2+2 시트 레이아웃으로 개발계획을 수정했다.

 

 

포르쉐를 상징하는 스포츠카, 911

 

901 T8 프로토타입 (1964)

 

포르쉐는 1963년 가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901 T8이라는 프로토타입 모델을 공개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자동차 메이커 푸조가 가운데 0이 들어간 세 자리 숫자로 이루어진 모델명을 사용하고 있었고, 901이라는 모델명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결국 901 T8은 911이라는 이름으로 1964년 여름부터 판매되기 시작했다.

 

911 1세대-5세대 모델들.

 

포르쉐 911은 1964년 등장한 1세대 모델의 이름이다. 2세대 모델은 ‘930’, 3세대에는 ‘964’라는 코드네임이 붙었으며 몇 차례의 개량을 거듭한 끝에 현재는 7세대 모델인 ‘991’이 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1세대에서 7세대까지 전 모델이 ‘911’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모델의 코드네임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리즈의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와 그가 디자인 한 911

 

911의 디자인은 부치 포르쉐로 잘 알려진, 페리 포르쉐의 첫째 아들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Ferdinand Alexenda Porsche : 1935-2012)의 작품이다. 부치 포르쉐는 1960년대 초반에 포르쉐 내부에 디자인 부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포르쉐 디자인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6세대 911(997) 카레라 S 쿠페

 

911을 이야기할 때 종종 모던과 클래식의 공존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지곤 한다. 911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둥근 헤드라이트와 차체 후방으로 끊어지는 부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루프라인이다. 이러한 루프라인은 사실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존재했던 쿠페 타입의 마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911은 그 자체로서 이미 클래식 쿠페 디자인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911은 탄생 50주년을 맞이했다. 911 1세대와 7세대(991) 모델.

 

911의 디자인은 지난 50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비록 1세대에서 7세대로 50년의 세월을 거치며 여러 가지 변화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멀리서 보았을 때 그 차가 911임을 한 눈에 알아본다. 911의 디자인은 이제 그 자체로서 포르쉐의 역사와 정통 스포츠카의 혈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포르쉐와 르망, 그리고 917

 

포르쉐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레이스다. 보통의 자동차에는 이그니션 키가 스티어링 휠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지만 포르쉐는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운전자가 자동차로 뛰어가 시동을 걸어 출발하는 과거의 레이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운전자가 왼손으로 열쇠를 꽂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기어를 조작해 출발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모든 포르쉐 모델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51년 르망24시에 참가한 포르쉐 356 레이스카

 

포르쉐는 1951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르망24시 내구레이스를 통해 레이스에 데뷔했고 356SL 레이싱카가 클래스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국제 레이스에서 차지한 첫 승리이기도 했다. 포르쉐는 이후 무려 17차례나 르망24시의 포디엄 정상에 올랐다. 물론 처음부터 우승컵을 차지한 것은 아니다. 페라리와 같은 강력한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숨어있다.

 

뉘르부르크링을 달리는 포르쉐 904 레이스카 (1964)

 

포르쉐는 1962년까지 F1에서도 활약했지만, GT레이스가 회사 이미지와 어울린다는 판단에 F1에서 물러나 1964년부터 르망24시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때 포르쉐가 내놓은 레이스카는 모델 904로, 경량화를 위해 차체를 유리섬유로 만들고 사다리꼴의 섀시를 최초로 도입하는 등 당시의 최신기술이 집약되었다. 904는 르망24시 뿐 아니라 뉘르부르크링 레이스, 몬테카를로 랠리 등 여러 레이스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1966년에는 후속모델인 906이 르망24시에 출전했다. 906은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이끄는 포르쉐 R&D팀에 의해 개발된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뛰어난 엔지니어였을 뿐 아니라 높은 경영수완으로 후일 아우디와 폭스바겐 그룹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폭스바겐 그룹 감독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포르쉐 906 (1966)

 

906은 220마력의 2리터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을 탑재해 시속 280km/h를 냈고, 1966년 르망24시에서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페라리 P 레이스카를 꺾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뜻밖의 복병이었던 포드 GT40 3대에게 승리를 내주며 4, 5, 6, 7위를 차지하는데 그쳐야만 했다. 1967년에는 최고속도 302km/h를 내는 907을 레이스에 투입했다. 그러나 대배기량 엔진을 탑재한 포드와 페라리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포르쉐는 보다 강력한 5리터 엔진을 레이스카에 탑재하기로 결정한다. 르망24시의 신화를 이룬 명기, 917의 탄생이다.

 

포르쉐 917K (1970)

 

917은 가볍고 콤팩트한 보디에 5리터 12기통 엔진을 탑재한 강력한 레이스카였다. 지나치게 강한 파워로 컨트롤이 어려웠다고 한다. 1969년 르망24시에서 917은 사고로 리타이어 하지만, 이듬해인 1970년 917K 숏테일과 917LH 롱테일 모델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며 르망24시의 우승컵을 차지한다. 게다가 3위는 포르쉐 908이었으며, 914-6GT 6위, 911S가 7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야말로 포르쉐의 독무대였다. 1970년은 포르쉐의 르망24시 도전 2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더욱 의미 있는 승리였다.

 

후미에 핀을 달아 공력성능을 개선한 917K (1971)

 

1971년에는 후미에 핀을 달아 공력성능을 개선한 917K가 르망24시에서 1, 2위를 차지한다. 이때의 기록은 24시간동안 평균시속 222kkm/h로 5335.313km를 달린 것으로, 2010년이 되어서야 아우디 R15 TDI에 의해 깨진다. 게다가 917LH가 세운 순간시속 394km/h는 지금도 역대 르망24시 최고 속도를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포르쉐 917에는 66마력의 공랭식 4.9리터 12기통 엔진이 탑재되었고, 무게는 800kg에 불과했다.

 

포르쉐 917/30 캔암 스파이더 레이스카 (1973)

 

917은 르망24시 외에도 다양한 레이스에 출전했으며, 다양한 엔진의 탑재와 튜닝이 이루어졌다. 무려 1580마력의 최고출력을 기록한 트윈터보엔진의 917/30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스포츠카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0-100km/h 도달시간 1.9초, 0-320km/h 도달에 10.9초, 최고속도 420km/h 이상이라는 엄청난 성능을 냈다. 그러나 1973년 이후 레이스에 까다로운 연비 규정을 비롯한 각종 규제가 적용되면서 917은 은퇴하게 된다.

 

포르쉐 936 (1977)

 

포르쉐 956 (1982)

 

917은 은퇴했지만 포르쉐의 승리가도는 계속되었다. 1976년과 1977년 포르쉐 936으로 2년 연속 종합우승 달성, 1982에는 새로운 규정으로 만들어진 그룹C 카테고리에 출전한 세 대의 956이 예선과 본선 1-3위를 모두 차지하기도 했다. 르망24시에서 어떤 자동차 메이커도 감히 포르쉐의 독주를 막지 못했다. 포르쉐의 승리가 계속되자 경쟁자가 없는 르망24시의 대중적 인기는 시들해지게 된다. 결국 포르쉐의 승리를 막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규제가 만들어지고, 1987년 포르쉐는 르망24시의 워크스팀 참가를 중단한다.

 

포르쉐 911 GT1 (1998)

 

물론 그 이후 포르쉐가 레이스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1995년 포르쉐는 돌연 르망24시 복귀를 선언, 1996년부터 911 GT1을 투입하여 레이스에 참가한다. 포르쉐는 1996년 GT1 클래스의 우승과 준우승, 1998년 포르쉐 워크스 팀이 르망24시 종합우승을 차지한 후 다시 홀연히 서킷을 떠났다.

 

918 스파이더, 전설을 계승할 새로운 슈퍼카

 

 

포르쉐는 2013년 가을,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918 스파이더의 양산 모델을 공개했다. 918 스파이더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기술이 탑재된 초강력 스포츠카로 엔진과 모터의 힘을 모두 사용하며, 최대출력 887마력에 1-100km/h가속시간 2.8초라는 강력한 성능을 낸다. 이 같은 고성능에도 불구하고 918 스파이더의 연비는 약 30-33km/l라는 뛰어난 효율을 자랑한다.

 

 

918 스파이더의 이름은 두 말 할 것 없이 917의 후계자임을 뜻한다. 포르쉐의 유전자는 르망24시와 같은 레이스를 통해 진화해 왔다. 레이스를 통해 시험하고 검증된 기술은 포르쉐의 로드카에 그대로 적용된다. 포르쉐는 이러한 최신 기술의 결정체가 바로 918 스파이더라고 말한다.

 

 

과거에 존재했던 명차의 그림자만을 빌린 것이 아니다. 918 스파이더는 2013년 9월 9일 뉘르부르크링 노르드슐라이페를 6분 57초에 달려, 서킷 뿐 아니라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자동차들 중 가장 빠른 뉘르부르크링 랩타임을 기록했다.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의 대열에 이름을 올린 918스파이더는, 917의 이름을 이어나갈 자랑스러운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음을 증명했다.

 

 

포르쉐는 슈퍼카라 불리는 918 스파이더와 911 외에도 정통 스포츠카인 박스터와 카이맨, SUV인 카이엔과 마칸, GT의 특성을 지닌 고성능 5도어 세단 파나메라를 선보이며 스포츠와 럭셔리를 아우르는 종합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포르쉐 자동차의 혈통에는 레이스에서 기량을 갈고 닦아온 경주마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포르쉐의 아이덴티티이며, 포르쉐가 세계 최고의 명문 자동차 메이커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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