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사냥개

선수들은 달리고 각 팀의 서포트카는 지켜본다. 사실 지켜본다는 표현보다 부르면 달려간다는 말이 서포트카의 역할을 더욱 잘 표현하는 듯하다. 가끔 타이어 펑크나 기계고장으로 팀 서포트카를 요청하는 내용의 무전이 들리면, 잠시 후 해당 팀의 서포트카가 앞쪽으로 달려 나가 타이어를 교체하거나 자전거를 바꿔 문제를 해결한다. 다행스럽게도 경기초반 내내 MTN-큐베카 팀의 선수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언덕 구간이 시작되면서 길 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볼 일을 보는 선수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다. 자전거를 기대놓을 곳이 없는 풀숲에서는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안장을 잡고 볼일을 보는 것도 선수 나름의 요령이라고 캠벨 감독이 설명해준다. 사실 길 가에서 볼일을 보는 선수들의 사진은 해외의 사이클링 매체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지만, 촬영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라고 해서 카메라를 내렸다. 레이스가 이렇게 지루한 것이었나 생각될 정도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이 이어지면서 아찔한 장면이 펼쳐진다. 약 100미터 전방에 펠로톤이 위치하고 그 뒤를 따라 달리는데, 자동차의 속도계를 보니 시속 90km/h가 넘는다. 저 앞쪽에 위치한 선수 대부분이 시속 90km/h 이상의 속도로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커브가 나올 때마다 캠벨 감독은 스티어링 휠을 거칠게 돌리고, 타이어의 비명과 함께 팀 서포트카도 고갯길을 돌아 내려간다. 간혹 빠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다른 팀의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를 피하며 달려 내려가는 팀 서포트카는 마치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아무 일이 없는 동안은 한가하지만, 만의 하나 선수에게 트러블이 생겼을 때 즉시 대처하기 위해서는 팀 서포트카가 늘 선수 가까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어지던 내리막 구간이 끝나고 완만한 길이 나오기 시작. 대부분의 선수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달리고 있었고, 전체 158.3km의 코스 중 50km지점도 채 오지 않은 초반이었다. 그런데 무전 내용을 들어보니 누군가 집단을 이탈해 앞쪽으로 브레이크 어웨이를 시도 중이라고 한다. 대집단의 선두를 이끌던 아스타나 콘티넨털 팀의 선수를 비롯한 몇이 메인 펠로톤과 점점 거리를 벌리고 있다고.

로드레이스를 처음 본 관중들이라면 가장 앞을 달리는 선수가 가장 빠르고 잘 달리는 선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집단으로 뭉쳐 100km를 달리는 것과 단독으로 100km를 달리는 것은 선수 개개인이 소모하는 에너지부터가 다르다. 집단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뭉쳐서 달리는 것이다. 메인 펠로톤에서는 여러 명의 선수가 교대로 선두를 이끌고 나머지 선수들이 그 뒤에 나란히 숨어 바람을 피한다. 설령 바람이 안부는 날씨라도 시속 45km/h로 달리는 선수들은 45km/h의 맞바람과 싸우게 되는데 이 바람을 극복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소수의 선수들이 메인 펠로톤을 뛰쳐나가 선두그룹을 형성하게 되면, 이 선두그룹의 선수들은 소수의 인원으로 쉴 새 없이 맞바람의 벽을 뚫고 달려야 한다. 메인 펠로톤의 선수들보다 훨씬 심한 체력소모를 겪으면서도, 조금 더 일찍 피니쉬라인에 도달하기 위해 이러한 손해를 감수하며 모험을 하는 것이다. 선두그룹을 형성한 선수들은 메인 펠로톤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팀이 다르더라도 서로 협력하며 달리게 된다. 일종의 전략적 제휴관계다.

무전기는 선두 그룹이 메인 펠로톤과 2분 50초의 격차를 벌리며 앞으로 나갔다고 상황을 말해준다. 선두 그룹이 토끼라면, 메인 펠로톤은 이를 쫓는 사냥개다. 아마 당분간은 거리의 여유를 두며 따라가겠지만, 토끼가 지쳤다고 생각되면 사냥개는 아껴둔 힘으로 순식간에 토끼를 잡으러 덤벼들 것이다. 명백히 앞서나가는 토끼가 불리하지만 가끔 이런 모험이 대박을 터뜨리는 게임, 이것이 로드레이스다.

무전기가 다시 상황을 말해준다. 잡음 때문에 정확히 누가 선두그룹에서 달리는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 팀의 장선재 선수가 선두그룹에 있다고 한다. MTN-큐베카 팀의 선수들은 메인 펠로톤에서 달리고 있다. 아마 선두그룹이 소수이기 때문에 금방 지칠 것이고, 메인 펠로톤이 이들을 쉽게 따라잡아 흡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간혹 로드레이스에서는 팀 에이스의 우승을 돕기 위해 도움선수가 메인 펠로톤을 떠나 브레이크 어웨이를 시도하는 척 하며 다른 팀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투르 드 코리아 스테이지 7 코스는 가파른 언덕 정상에서 끝난다. 그리고 투르 드 코리아 8일간의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차피 우승을 노릴 수 없는 일부 선수들이라면 메인 펠로톤에서 빠른 속도를 내기위해 애써 페이스를 높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메인 펠로톤이 속도를 내지 않아 언덕에 도착할 때까지 2분 30초의 간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평지에서 체력을 소모하는 대신 마지막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조금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콜라 줄까?”

다른 팀원에게 물을 전달하기 위해 광속질주! 등 주머니를 불룩하게 채운 것은 다름 아닌 물병이다.

경기는 큰 상황변화 없이 계속 진행되었고, 12시를 조금 넘어 선수들에게 음식을 보급하는 피드존(Feed zone)에 진입했다. 캠벨 감독과 뒷자리에 앉은 안드레스가 창문을 내리고 바깥 상황을 유심히 살핀다. 사실 선수들에게 음식을 보급하는 것은 팀 서포트카의 역할이 아니라 미리 피드존에 가있던 다른 멤버들의 일이지만, 보급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음식을 못 받은 선수가 있다면 여분의 음식을 전달해야만 한다.

피드존에는 손에 물통과 보급낭을 가득 든 각 팀의 지원조가 대기하고 있다. MTN-큐베카 팀의 보급낭에는 샌드위치가 들어있다고. 선수들은 피드존을 지나는 동안 음식을 꺼내고 불필요해진 보급낭과 빈 물통을 길에 버린다. 자전거 전문 숍에서 만 원 가까운 가격에 판매되는 ‘비싼 물통’이 버려지는 것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버려진 물통과 보급낭이 관중들에게는 좋은 기념품이 되기도 한다.

MTN-큐베카 팀은 큰 문제없이 보급을 마쳤다. 그런데 피드존을 빠져나온 직후, 무전기가 갑자기 MTN-큐베카 팀의 서포트카를 호출한다. 메인 펠로톤에서 달리고 있던 크리스티안 스바라글리 선수의 자전거 뒷바퀴에 펑크가 난 것이다. 서포트카는 급가속해 앞서 달리는 선수의 무리에 접근하고, 스바라글리 선수는 펠로톤 후미로 빠져나와 달리고 있었다. 펑크가 났다고 해서 그 자리에 멈춰서지는 않는다. 펑크 난 타이어로도 달릴 수 있는 한 최대한 달리는데 메인 그룹과 거리가 벌어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함이다.

팀 서포트카가 멈춰 서자마자 안드레아스가 스페어 바퀴를 들고 뛰어나간다. 스바라글리가 자전거에서 내리는 순간 안드레아스가 뒷바퀴를 고정하는 퀵 릴리즈를 풀어 펑크 난 바퀴를 빼고 새 바퀴를 끼우는데, 시간을 재보니 문을 박차고 나가 바퀴를 완전히 갈아 끼우는데 8초가 걸렸다. 그야말로 섬광 같은 속도다. 안드레아스는 50미터 정도 전진한 펠로톤까지 스바라글리가 좀 더 빨리 달려갈 수 있도록 달려가는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준 다음 차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뒷자리에서 음악을 들으며 농담하고 있었지만, 필요한 순간 바로 프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앞서나간 선두 그룹은 여전히 메인 펠로톤과 2분 50초의 시간차를 유지하고 있다. 팀 서포트카가 약 90km 지점인 삽당령 정상을 지나 내리막길로 진입하는데,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장선재 선수가 선두 그룹에서 다시 한 번 어택을 시도했다는 내용이 무전으로 들려온다. 하지만 펠로톤이 선두그룹을 추격하기 시작한 듯 시간 차이가 2분 30초, 2분 8초 점점 줄어든다.

선두그룹에서 달리던 지친 선수들이 하나 둘 후방으로 흘러 메인 펠로톤에 흡수되고, 결국 장선재 선수를 포함한 몇 명의 선수들이 펠로톤의 추격을 뿌리치려 애쓰고 있었다. 골인지점은 점점 다가오는데, 피니쉬라인을 20km 남겨둔 지점에서 펠로톤과의 시간 차이는 1분 30초. 게다가 차이는 점점 줄어들었다. MTN-큐베카 팀의 선수들은 여전히 메인 펠로톤에서 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아무 이상 없이 팀의 작전대로 레이스가 진행되었다.

MTN-큐베카 팀은 마지막 언덕인 진고개 아래에 도착할 때 까지 최대한 체력을 아끼다가, 언덕 중간에서 다른 팀과 함께 점차 페이스를 올려나간다는 작전을 세웠다. MTN-큐베카로서는 팀 종합순위 1위인 아반티 레이싱 팀을 추격하는 것이 개인의 우승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면 투르 드 코리아 스테이지 7 경기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셈이다.

하지만 경기는 예상대로 풀리지 않았다. 장선재 선수는 결국 추격에 따라잡혀 펠로톤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언덕 구간에 들어가자 각 팀에서 스테이지 우승을 노리는 여러 선수들이 산발적으로 어택을 시도한다. MTN-큐베카 팀으로서는 다른 모든 팀이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비슷한 성적으로 피니쉬라인을 통과하는 것이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우승을 노리는 선수들이 돌발적으로 뛰쳐나가면서 펠로톤은 산산이 분해되었다.

게다가 악재는 또 있었다. 길이 7.3km 평균경사도 8.7%의 1등급 산악구간인 진고개는 너무나 가팔랐고, 지난 6일간의 레이스에서 지친 MTN-큐베카 팀 선수들이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린 것이다. 언덕을 오르는 선수들의 후미에서 MTN-큐베카의 노란 유니폼을 발견한 캠벨 감독은 순간 패닉에 빠진 듯했다.

길가에서 응원하는 관중들의 환호에 경적을 울려 답변하면서도 캠벨 감독의 눈은 언덕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언덕에서 선두를 달리는 선수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캠벨 감독의 소원이었을 것이다.

서포트카는 선수들을 앞지르며 정상으로 올라갔다. 무전기에서 라파-콘도르-JLT 팀의 휴 카시 선수가 피니쉬라인을 통과했음을 알린다. 예상했던 대로 MTN-큐베카 팀의 선수는 순위권에 들어오지 못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선수가 중위권의 성적으로 피니쉬라인을 통과하면서 팀 종합 성적을 크게 깎아내렸다. 스테이지 7이 시작되기 전 팀 종합순위 2위인 MTN-큐베카 팀과 1위인 OCBC 싱가포르 팀의 격차는 17초로 역전이 가능하다고 예상되었는데, 경기를 마친 후 3위였던 팀에게 역전 당했고, 차이가 1분 41초로 더욱 크게 벌어졌으니 캠벨 감독으로서는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었으리라. 사실상 MTN-큐베카 팀은 투르 드 코리아의 팀 종합 우승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레이스를 마친 MTN-큐베카 팀의 선수들의 모습을 보니 이날의 레이스가 얼마나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는지 짐작된다. 레이스 중에도 늘 웃는 모습을 보여주던 선수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피로와 고통만이 남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충분한 휴식이다. MTN-큐베카 팀은 이날의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무대에 오를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일의 경기를 생각하는 팀으로서는 조금이라도 일찍 숙소로 가서 선수들이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경기 마무리 때문에 바쁜 캠벨 감독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스테이지 7의 우승자인 라파-콘도르-JLT 팀의 휴 카시 선수는 옐로우 저지를 입었고, MTN-큐베카 팀의 크리스티안 스바라글리 선수는 하늘색 스프린트 저지를 비니-판티니-니포 팀의 그라게 볼 선수에게 넘겨줘야만 했다. 가장 많은 산악 포인트를 차지한 산악왕에게 주어지는 레드 폴카 닷 저지는 코레일 사이클링 팀의 장경구 선수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다음 날인 스테이지 8에서도 이 순위는 변하지 않았고, 결국 라파-콘도르-JLT 팀의 휴 카시 선수가 개인 종합우승, 아반티 레이싱 팀이 팀 종합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경기 결과만 놓고 본다면 MTN-큐베카 팀은 올해의 투르 드 코리아가 무척 아쉬울 수밖에 없다. 비록 팀 종합 2위에 올랐지만 팀 종합 우승을 아깝게 놓친 것을 비롯하여, 눈에 띄는 특별한 성적을 낸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8일 동안 달리면서 남긴 것은 단순한 경기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 레이스를 지켜보는 많은 팬들에게 열정과 감동적인 드라마를 전달했고,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우리나라를 희망의 끈으로 연결했다.

투르 드 코리아는 아시아 최고의 투어 레이스를 목표로 매년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회다. 아마 내년에도 많은 팀과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MTN-큐베카 팀 역시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찾을지도 모른다. 투르 드 코리아에 참가한 모든 팀과 선수들의 건승을 바라며, 앞으로 더 나은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 장낙규 기자
사진 : 문인영 기자, 장낙규 기자, 국민체육진흥공단, 대한사이클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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