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착 접히는 작은 자전거가 하나 생겼다. 바짓단을 당기며 놀아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처럼, 책상 아래 발치에서 어딘가로 훌쩍 떠나자고 유혹한다. 멀리 떠나기에는 시작부터 지칠 것 같은 더운 날씨지만, 갑갑한 콘크리트 상자 안에 갇혀있기에는 하늘이 너무 파랗고 예쁘다.

사무실 구석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 내킬 때 훌쩍 떠날 수 있게 ‘준비된 배낭’을 가진 남자가 되기로 결심한지 몇 개월이나 되었더라? 벌써 그때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 아닐까 내심 걱정되는 지금이 바로 떠날 때다.

여름이 가기 전에 별이라도 느긋하게 보려면 텐트 정도는 쳐야겠다. 가장 가까운 야영장이 어디인지 찾아보았다. 멀리는 아니지만 작은 자전거와 함께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작은 캠핑 콘셉트, ‘브롬핑(Bromping, Brompton + Camping)’을 즐기러 떠난다.



브롬톤, 영국에서 온 두 바퀴 파트너





MTB나 로드바이크를 갖고 있어도 아직 자전거 한 대 쯤 더 가질 여력이 된다면, 일상에서 늘 곁에 두고 탈만한 자전거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미끈하게 몸에 달라붙는 운동복 대신 정장이나 캐주얼한 차림이 잘 어울리는 자전거가 무난하고, 여행도 함께 갈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자전거라면 로드바이크를 한 대 갖고 있지만 이 녀석은 레이스를 위한 경주마다. 평소에도 부담없이 탈 수 있는 일상용 자전거를 한 대 더 구입했다. 바로 브롬톤이다. 접으면 책상 밑에도 들어갈 만큼 작게 변하지만, 펴면 성인이 타기에도 충분한 휠베이스를 가진 미니바이크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이용 시에도 들고 탈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다 보면 휴대성보다는 보관이 편리한 것이 이런 접이식 자전거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느껴진다.







브롬톤은 17인치의 작은 바퀴 때문에 어린이용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바퀴가 작다곤 해도 긴 휠베이스(앞뒤 바퀴간 거리) 때문에 안장에 올랐을 때의 자세는 큰 바퀴 자전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전거의 크기도 가격도 엄연한 성인용이다. 브롬톤을 사고 꾸미는데 한 달 월급이 거의 통째로 들어갔다.

가격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브롬톤은 애초에 값싸게 많이 팔기 위한 자전거가 아니다. 그런데 프리미엄을 내세우는 자전거임에도 장착된 순정부품은 중저가 생활자전거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롬톤을 대신할 만큼 편리한 접이식 자전거는 없다. 결국 브롬톤에 꽂히면 브롬톤을 살 수 밖에 없는데 솔직히 구입하면서도 다소 약이 오르는 부분이다. 브롬톤을 구입하자마자 제일 먼저 순정보다 가볍고 튼튼한 바퀴를 새로 주문해서 교체하고, 핸들바와 시트포스트를 가벼운 티타늄제로 바꾸었다.







브롬톤은 핸들링이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 초보자가 타기엔 쉽지 않다. 흔히 팬들이 브롬톤을 민첩한 자전거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주행 안정감이 낮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주행 안정감을 테스트해보는 가장 쉬운 방법이 핸들에서 손을 살짝 떼고 달려보는 것인데, 브롬톤은 양손으로 핸들 놓고 타기가 굉장히 어려운 자전거다. 하지만 무게중심이 낮고 코너링이 예리하기 때문에 브롬톤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면 상당히 스포티한 주행이 가능하다. 직접 타보니 매년 브롬톤 챔피언십이라는 ‘브롬톤을 이용한 치열한 크리테리움 레이스’가 열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캠핑 준비





작은 자전거 한 대로 떠나는 캠핑이지만 갖출 건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단 캠핑의 기본 아이템인 텐트와 침낭을 챙기고, 아웃도어 생활에서 굉장히 유용하다는 야전삽을 뺀 대신 야전침대를 텐트와 같이 꾸렸다. 간이 매트리스에는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는 허리와 등 때문이다. 야전삽과 비교하면 훨씬 가볍다.







캠핑의 가장 큰 즐거움인(?) 먹기 위한 준비도 빼놓을 수 없다. 고화력의 버너와 냄비는 필수. 사실 버너는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어차피 멀리 갈 것 아니니 편리함을 위해 무게를 감수하고 두 개를 챙겼다. 사실 요즘 나오는 버너 중에는 어린이 주먹 만 한 초소형 경량 제품도 많으니 큰 부담은 아니다. 프라이팬과 냄비를 겸한 코펠, 수저를 챙기면 요리 준비 완료. 이제 식재료만 남았다. 말로 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나름 콤팩트한 도구들을 챙겼음에도 배낭 크기가 제법 된다. 부피에 비해 보기보다는 가볍지만 학생 때 짊어지고 다니던 책가방보다는 무겁다.







마트에 들러서 즉석식품 코너를 둘러보니 TV 방송의 영향인지 전투식량의 인기가 높다. 군 시절 알파형 건조식량과 브라보형 레토르트식량 중 뭐가 더 맛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포장 용기에 쓰인 ‘실제 군납업체가 만든 밥’이라는 문구를 보니 먹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군필자인 탓이다.







즉석 밥과 김치볶음, 베이컨, 미리 주사위모양으로 썰어놓은 쇠고기를 약간 샀다. 식수는 캠핑장에도 있으니 생략하고, 이동하면서 마실 물만 주머니에 담았다. 저녁과 아침거리만 준비하면 되니 과하게 챙길 필요는 없다.



진짜로 떠나다





브롬톤의 프론트 캐리어에 아이스박스를 묶고, 백패킹용 배낭을 메었다. 아무리 단거리 라이딩이라도 헬멧은 필수. 휴대가 편리한 카레라의 접이식 헬멧을 선택했다. 그런데 헬멧을 쓰고 배낭을 매니 머리 뒷부분이 가방에 눌려 불편하다. 가방이 자전거 라이딩용이 아닌 탓이다. 그나마 돌출된 부분이 적은 클래식한 스타일의 둥근 헬멧이라 살짝 불편한 정도인데, 라이딩 시의 불편함을 완전히 해결하려면 가방을 바꾸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방 크기를 줄이는 대신, 가방 외부에 텐트와 침낭을 묶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짐이 많은 만큼 평소의 라이딩보다 경쾌함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급가속과 급정지를 줄이고 느긋하게 속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고 달리면 의외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 사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가속할 때 힘을 빼기 때문에, 짐이 많다고 해서 꼭 느린 것만은 아니다. 물론 평지에서의 이야기고 야트막한 오르막이라도 만나면 꼼짝없이 땀을 한 바가지 빼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전거의 앞쪽에 짐을 많이 실었는데, 이 짐이 핸들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자전거의 프레임에 부착되어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전거로 턴을 해봐도 의외로 가볍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앞쪽에 부착된 짐이 다른 사람의 자전거나 주변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도록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짐을 실은 브롬톤은 몸이 가벼운 평소와 완전히 다른 자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혹시 브롬톤에 짐을 싣고 여행을 계획한다면 예행연습 삼아 짐을 싣고 라이딩 한번쯤은 해보는 게 좋겠다.







목적지는 상암 노을공원 캠핑장으로 잡았다. 지도를 보면 한강 자전거도로 바로 옆으로 무척 가깝다. 자전거도로에서 캠핑장 쪽으로 나가는 굴다리 출구도 있다. 캠핑장까지 가는데 계단이 있지만, 자전거에서 내려 밀고갈 수 있도록 경사로가 나있다고 하니 아무 걱정 없이 출발했다.




: 이 때만 해도 마냥 좋았다.



하지만 웬걸, 경사로가 있어도 자전거에 실린 짐이 많아 밀고 올라갈 수가 없다. 자전거 양 옆으로 돌출된 짐 때문에 결국 자전거를 메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야말로 굽이굽이 언덕인데 정확히 해발 몇 미터나 올라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계단은 정확히 558개, 세어보지 않아도 다 써 있다.




: 서울시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메고 산을 오를 줄은...




: 이것저것 다 해보며 자신의 방식으로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계단은 굉장히 힘들었다.




: 상암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기가 서울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보통 캠핑장 이용객들은 노을공원 반대편에서 운영하는 맹꽁이 전기차에 짐을 싣고 편하게 올라온다고 한다. 반대편 언덕을 이용하면 자전거를 타고 올라올 수 있지만, 사실 급경사라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사진 촬영차 따라온 기자 C가 얼마나 힘든지 체험하러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는데,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고 한다.







잠깐 쉬며 체력을 회복하고 텐트를 치니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다. 2인승 경량 텐트는 자전거 여행과 백패킹을 위해 최근 새로 구입한 것으로, 3개의 폴로 지지되는 구조인데 혼자서도 무리 없이 설치할 수 있었다.







설치시간은 5분 정도였지만, 텐트의 위치를 옮긴 다음 고정하는 6개의 팩을 사방에 박는데 5분 정도가 더 걸렸고, 맥주와 사이다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물 떠오는 데도 5분 정도 걸렸다. 그야말로 30분도 안 되어서 후다닥 야영 준비 끝.




: 자전거 캠핑의 한계 아닌 한계라면, 운반할 수 있는 장비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오토캠핑의 넉넉함과 아늑함을 추구하려다가는 몸이 힘들어진다. 불과(?) 이만큼의 장비를 옮기는데도 제법 크고 무거운 가방을 꾸려야 했다. 자전거 캠핑에는 가볍고 소박한 장비가 어울린다.







조금 이른 듯해도 혼자 캠핑 나왔을 때, 번거로운(?) 요리는 어두워진 다음보다는 밝을 때 하는 게 경험상 훨씬 편하다. 코펠을 꺼내 하나에 물을 끓이고, 다른 하나에는 베이컨을 볶았다. 준비 시간은 5분 남짓, 요리에는 10분 정도가 걸렸다. 캠핑장 매점에서 판매하는 장작을 구입하면 손쉽게 캠프파이어도 할 수 있지만, 마른나무라도 그리 쉽게 불이 붙는 것이 아니기에 착화제를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휴가철이지만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캠핑장에는 아직 한적함이 남아있다. 라디오를 틀어보니 배철수 아저씨가 휴가를 갔는지 신해철 씨가 MC를 보고 있다. 야전 침대를 펼쳐놓고 누우니 하늘이 보인다. 시야 가장자리에 빌딩과 전선 따위 걸리지 않는 하늘만 가득한 풍경이 오랜만이다. 무거운 짐을 메고 뜨거운 햇살을 견디며 가파른 계단을 올랐지만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브롬톤을 끌고 캠핑을 나온 보람이 있었다.



에필로그

저녁 8시가 넘으니 캠핑장이 점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한다. 비어있던 자리에도 점점 텐트가 늘어나고, 장작불과 고기 굽는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오른다. 옆 텐트의 음악소리에 라디오 소리가 묻힌다. 노래는 한 쪽에서만 틀어야 제대로 들린다는 생각에 라디오를 껐다. 휴가철을 얕봤다. 평일 저녁이라도 도심의 캠핑장에서 고요를 기대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나 보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밀려드는 옅은 안개에 달이 흐리게 보이고, 텐트와 자전거에도 이슬 같은 물방울이 맺혀있다. 일기예보에 내일 날씨가 흐림이라더니 아무래도 새벽 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즐겁지 않은 곳에 더 이상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으니 지체 없이 철수를 결정했다. 집채만 한 텐트와 짐을 자동차에 바리바리 싣고 올라왔다면 전기차가 운행을 시작하는 내일 아침까지는 꼼짝없이 캠핑장에 발이 묶였겠지만, 자전거를 타고 온 여행자는 떠나는 것도 가볍고 자유롭다. 일상에서 탈출을 꿈꾸었듯 이번에는 캠핑장을 탈출한다. 자전거로 텅 빈 도로를 타고 달리니 이 또한 즐겁지만 슬슬 어깨가 아프다. 아무래도 브롬톤과 함께 여행을 떠나려면 가방을 좀 더 가볍게 꾸려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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