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자전거 메이커가 레이스에 참가한다. 프로 레이서와 팀을 후원하며 자전거를 공급하는 메이커도 있지만, 메이커가 직접 운영하는 ‘팩토리 레이싱 팀’의 경우 자전거 브랜드를 홍보하는 역할 뿐 아니라 신기술이 적용된 자전거를 가장 먼저 테스트하고 새로운 자전거의 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트렉 팩토리 레이싱은 가장 주목받는 팀 중 하나다. 늘 상위권의 우수한 성적을 내는 팀일 뿐 아니라 트렉의 신기술이 적용된 자전거들, 특히 레이스용으로 개발된 최상급 모델을 트렉 팩토리 레이싱의 선수들이 가장 먼저 타고나와 실전에서 테스트하기 때문이다.
올해 초 등장한 트렉 ‘프로칼리버 SL’ 역시 트렉 팩토리 레이싱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델 중 하나다. 첫 등장 당시에는 트렉의 기존 크로스컨트리(XC) 레이스용 모델인 슈퍼플라이 SL의 후속기종으로, 트렉의 특허기술인 ‘ISO SPEED'라는 디자인이 처음으로 적용된 MTB 모델로 큰 화제를 모았다.
: 프로칼리버 SL 9.9 (2015)
ISO SPEED는 원래 트렉이 장거리 로드바이크용으로 개발하어 레이스에서 큰 성과를 거둔 기술이다. ISO SPEED가 적용된 로드바이크 모델 ‘도마니(Domane)’는 가장 거칠고 험한 로드레이스 중 하나인 파리-루베 레이스에서 우승하며 뛰어난 성능을 증명했고, 뒤이어 사이클로크로스 모델인 ‘분(Boone)’에도 ISO SPEED가 적용된다. 장거리 험로 주행에서 특히 강력한 효과를 내는 신기술지만 로드바이크에 먼저 적용되어 성능을 검증받고 MTB에 탑재되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새로운 자전거가 출시되면 이전모델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프로칼리버 SL은 이전모델인 슈퍼플라이의 이름을 대물림하지 않았다. 아마 트렉은 프로칼리버 SL이 기존의 레이스바이크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 개리 피셔 프로칼리버 (1992)
게다가 프로칼리버라는 이름은 사실 트렉 MTB의 뿌리와 정통성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1974년 최초의 MTB를 만든 산악자전거의 대부 ‘개리 피셔(Garry Fisher)’가 만든 자전거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개리 피셔는 큰 바퀴의 장점을 깨닫고 국제사이클연맹(이하 UCI)을 설득해 레이스에서 29인치 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득한 장본인으로, 현재 27.5인치과 29인치 휠의 MTB가 보급된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트렉은 개리 피셔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해왔고, 개리 피셔는 현재 트렉의 다양한 자전거의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개리 피셔는 레이스용 자전거에 짧은 체인스테이와 긴 탑튜브로 무게중심을 뒤로 옮겨 추진력과 안정감을 높이고, 짧은 스템을 장착해 핸들링의 민첩함을 보완한 ‘제네시스 지오메트리’를 적용했다.
현재의 트렉 G1/G2 지오메트리는 개리피셔 제네시스 지오메트리를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다. 게다가 라이더의 체구에 따라 27.5인치/29인치의 크기가 다른 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스마트 휠 사이즈’를 도입하여 더욱 완벽한 피팅이 가능하도록 진화했다. 트렉의 MTB의 뿌리에는 개리 피셔의 레이스 디자인 철학이 녹아있다.
참고로 1980년대~2000년대 개리 피셔를 대표하는 MTB 모델 중 ‘프로칼리버’ ‘슈퍼칼리버’ ‘엑스칼리버’ 등이 있다. 트렉이 신형 레이스바이크에 ‘프로칼리버 SL’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레이스에서 검증된 ISO SPEED 디자인
트렉 프로칼리버 SL의 가장 큰 특징은 앞에서 말했듯 ISO SPEED 디커플러가 적용된 것이다. 여기에서 ‘디커플러(Decoupler)란 연결되어있는 것을 분리하는 장치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자전거 프레임은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프로칼리버 SL은 자전거의 탑튜브-시트스테이 중간에 ISO SPEED 디커플러가 시트튜브가 ‘분리’하여 앞뒤로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해준다.
쉽게 말해 자전거가 아래위로 충격을 받거나 라이더가 안장에 앉아 강하게 페달링 할 때 ISO SPEED 디커플러의 축을 중심으로 안장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 프로칼리버 SL의 특징. ISO SPEED는 단순히 충격을 흡수하는 서스펜션이 아니라, 프레임의 탄성으로 충격을 흡수했다가 이 에너지를 페달링에 더해 추진력으로 바꿔주는 장치다. 대나무가 휘어졌다가 스프링처럼 복원되며 저장된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을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물론 프로칼리버 SL의 프레임은 대나무보다 훨씬 단단하고 라이더는 안장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꾸준히 페달링하며 달리다보면 딱딱한 자전거에 힘을 쏟아 부을 때와 다른 독특한 리듬감과 함께 경쾌한 주행감이 느껴진다.
레이스를 위한 고성능 컴포넌트
라이드매거진이 시승한 모델은 프로칼리버 9.9 SL. 그야말로 메이커를 대표하는 기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레이스바이크다. 브레이크와 구동계는 시마노 XTR과 레이스페이스의 싱글 체인링 조합을 사용하며, 락샥의 최상급 서스펜션 포크인 RS-1, DT스위스 XMC1200 카본 휠세트가 장착된다. 더 이상 업그레이드할 부분이 없다. 각 메이커가 가진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최상급 부품들이다.
싱글 체인링 크랭크와 11단 스프라켓 구성의 1×11단 구동계는 원래 시마노의 경쟁사인 스램이 주력으로 내세우는 방식이다. 그러나 시마노 XTR 구동계를 사용하면서도 크랭크는 라이벌 스램이 개발한 내로우-와이드 방식 체인링을 사용하는 레이스페이스 넥스트 SL을 장착했다. 크랭크에 변속기가 달려있지 않아 구조가 단순하며 무게가 가볍다. 여기에 시마노 컴포넌트의 높은 신뢰도를 더하니 각 메이커의 장점을 가져온 셈이다.
락샥 RS-1 서스펜션 포크는 포크 안쪽으로 들어가는 스텐션 튜브가 아래쪽에 위치하여 일반적인 포크를 위아래로 뒤집어놓은 듯한 형태인 도립식 포크다. 도립식 포크의 장점은 무엇보다 ‘서스펜션 아래쪽이 가볍다’는 점이다. 기존의 서스펜션과 비교하면 RS-1 포크는 앞바퀴, 그리고 바퀴 좌우의 스텐션 튜브만이 상하로 움직인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부분이 가볍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서스펜션의 복원도 빠르다. 단점이라면 스텐션 튜브가 쉽게 오염될 수 있고, 넘어지거나 노면에서 튀어 오르는 돌에 의한 스크래치 등 손상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꼼꼼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참고로 29인치 모델의 경우 트렉 G2 지오메트리에 따라 포크는 51mm 오프셋 모델이 장착된다.
휠세트의 가벼운 무게는 빠른 가속과 언덕의 등판능력을 좌우하는 요소다. DT스위스 XMC1200는 27.5인치 1450g, 29인치 1495g의 최상급 경량 카본 휠세트로 힐클라임과 다운힐 모두 빠르고 안정적인 성능을 보여준다. 또한 29인치 모델의 경우 뒷바퀴 허브 폭을 늘려 휠과 프레임강성을 높인 부스트 148 규격을 채택했다. 튜브리스 레디를 지원하며, 프로칼리버 9.9 SL에 기본 장착된 타이어인 XR1 팀 이슈 역시 튜브리스 레디를 지원한다. 휠에서 튜브를 제거한 다음, 밸브코어를 장착하고 실런트를 넣으면 튜브리스 세팅이 가능하다.
핸들바와 스템, 시트포스트는 본트래거의 경량 카본 컴포넌트인 ‘XXX' OCLV 카본을, 안장은 본트래거 몬트로스 프로 카본 레일을 장착했다.
부드러움과 단단함, 두 얼굴의 야누스
자전거 메이커가 달라도 상대적으로 구조가 비슷한 하드테일 MTB들이 지향하는 특징은 대체로 비슷하다. 가벼운 무게와 추진력의 향상을 위한 설계, 프로칼리버는 여기에 ISO SPEED라는 새롭고도 이질적인 기술을 더했다. 따라서 시승은 ISO SPEED의 성능을 느끼는데 초점을 맞췄다.
필자가 ISO SPEED를 경험한 것은 프로칼리버 SL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로드바이크 도마니와 사이클로크로스 분을 통해 체험해본 ISO SPEED의 우수함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단 이것이 MTB에 적용되어 산길에서 어떤 효과를 낼지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앞서 ISO SPEED가 단순한 서스펜션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라이더에게 전해지는 노면의 충격을 ISO SPEED가 받아들여 추진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서스펜션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트렉이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프로칼리버 SL은 트래블 11mm의 리어휠 서스펜션 트래블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한다. 뒷바퀴가 상하 11mm 움직이는 자전거와 비슷한 수준의 충격흡수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뒷바퀴가 충격을 흡수하는 방식과 ISO SPEED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뒷바퀴에서 충격을 흡수하려면 프레임의 뒤쪽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라이더의 추진력을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는 힘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힘의 손실이 일어난다.
반면 ISO SPEED는 자전거가 무른 것이 아니라, 안장-시트포스트와 연결된 시트튜브만 유연하게 움직인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자전거의 프레임은 단단하다. 라이더가 앉아서 달릴 때는 안장이 앞뒤로 움직이며 충격과 진동을 감쇄시켜 편안하지만,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는 순간 단단한 자전거가 되어 라이더의 힘을 손실 없이 지면에 쏟아 부으며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끊임없이 노면이 변화하는 산길에서 라이더는 많은 시간동안 엉덩이를 안장에서 떼고 달린다. 안장에서 일어나 페달에 체중을 싣는 순간 자전거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페달링 토크를 거의 손실 없이 바퀴에 전달해 지면을 긁으며 자전거를 앞으로 밀어낸다. 안장에 앉았을 때의 부드러움과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댄싱 하는 순간의 단단함이 마치 야누스와 같은 상반된 모습이다.
여기에 프레임의 가벼운 무게가 더해지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 산길의 가파른 비포장 구간에서도 굉장히 다루기 편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에서도 자전거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여유를 조금 더 준다.
내리막길에서는 단단한 프레임과 높은 강성의 휠이 안정적인 주행성능을 보여준다. 트렉의 이전 모델과 마찬가지로 안정감과 민첩함이라는 상반된 특성의 밸런스를 잘 잡았고, 특히 RS-1 포크의 성능에는 감탄만이 나올 뿐이다.
산길에서 보여주는 RS-1의 퍼포먼스는 놀랍도록 부드럽고 빠르다는 말로 표현된다. 노면의 미묘한 굴곡변화를 빠르고 섬세하게 읽어내 부드럽게 반응하며, 특히 고속주행 시 앞바퀴를 통해 느껴지는 꾸준하고 일정한 그립감이 만족스럽다. 오프로드가 아닌 아스팔트길을 달리더라도 기존의 포크보다 충격과 진동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ISO SPEED는 레이스에서도 그 효과를 보여주겠지만, 마라톤이나 랠리와 같은 장거리 라이딩 시 진가를 발휘하지 않을까? 특히 MTB 라이더 모두가 레이서는 아니다. 오히려 장거리 투어나 트레일 라이딩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풀서스펜션보다 하드테일을 선호하는 라이더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ISO SPEED를 통해 뛰어난 추진력을 보여주면서도 편안함을 함께 지닌 레이스바이크 프로칼리버 SL은 우리나라의 MTB 라이더에게 잘 어울리는 모델임을 확신할 수 있다.
최상급 모델인 프로칼리버 9.9 SL의 가격은 889만원이다. 그만큼의 가치를 가진 레이스 바이크지만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다. 그러나 부품등급과 가격을 낮춘 프로칼리버 9.7 SL이라면 보다 손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고성능 플래그십 프레임과 실속 있는 부품 구성을 원하는 라이더에게 추천할만하다. ISO SPEED라는 놀라운 기술로 무장한 트렉의 신형 하드테일 MTB의 유혹, 한 번이라도 함께 달려본다면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프로칼리버 9.9 SL 제원
프레임 : OCLV 마운틴 카본, ISO SPEED, E2 테이퍼드 헤드튜브, 컨트롤 프릭 인터널 케이블 라우팅
(29” 모델은 G2 지오메트리 및 부스트148 적용)
(29” 모델은 G2 지오메트리 및 부스트148 적용)
포크 : 락샥 RS-1, 100mm 트래블, 솔로 에어, 액셀러레이터 댐퍼, XX 스프린트 리모트 락아웃, E2 카본 테이퍼드 스티어러,
(29” 모델은 51mm 오프셋 적용)
(29” 모델은 51mm 오프셋 적용)
크랭크 : 레이스페이스 넥스트 SL 32T
시프터 : 시마노 XTR SL-M9000
뒤 디레일러 : 시마노 XTR RD-M9000-SGS
카세트 : 시마노 XTR CS-M9000 11-40T 11단
체인 : 시마노 XTR CN-HG900-11
브레이크 : 시마노 XTR BL-M9000
타이어 : 본트래거 XR 팀 이슈, 튜브리스 레디 27.5×2.2/29×2.0
휠세트 : DT스위스 XMC1200 프리딕티브 스티어링 110
스템 : 본트래거 XXX, OCLV 카본, 31.8mm, 7도
핸들바 : 본트래거 XXX, OCLV 카본, 31.8mm, 제로 라이즈
그립 : ESI Chunky
헤드셋 : FSA IS-2 카본, E2, 실드 알로이 카트리지
안장 : 본트래거 몬트로스 프로, 카본 레일
시트포스트 : 본트래거 XXX, OCLV 카본, 31.6mm, 5mm 오프셋
사이즈 : 15.5"(27.5" 휠), 17.5, 18.5, 19.5"(29" 휠)
색상 : 매트카본스모크
가격 : 889만원
글
장낙규 rockyou@ridemag.co.kr
제공
라이드매거진(ride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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