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얼리 어답터’라고 불리는 발빠른 사람들, 신제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1차적인 전기차 인기가 한바탕 지나간 후 지금은 ‘캐즘’이라 불리는, 수요가 한풀 꺾여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동화의 흐름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모든 브랜드에선 자체적인 전동화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차근차근히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일시적으로 수요가 줄었다고 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모든 자동차들을 전동화해 환경오염을 줄인다는 목적으로 시장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차의 아이오닉 5와 기아 EV6를 필두로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기아는 EV6 이후 대형 SUV인 EV9를 선보인 다음 차례로 EV3, EV4, EV5 등의 제품을 연이어 선보일 것이라 밝힌 바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모델인 EV3의 실물을 공개하며 사전계약 등으로 기대감을 높여왔다. 드디어 본격 판매에 맞춰 미디어 시승회가 마련되어 현장을 찾아 기존 전기차와는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았다.

외관에서는 기아의 인기제품 중 하나인 쏘울의 냄새가 풍긴다. 전기차라면 공기저항을 최소하하기 위해 유선형이나 날카로운 디자인을 많이 채택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은 것이 전기차의 장점인 공간성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전기차는 내연기관보다 휠베이스를 길게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해 동급 내연기관 모델 대비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크로스오버나 SUV로 오면 박스카 스타일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EV3도 마찬가지. ‘리틀 EV9’이라 부를 수 있을 듯한 2박스 형태의 차체는 후면으로 갈수록 살짝 낮아지는 루프라인으로 스포티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전면부는 기아 특유의 타이거 페이스 디자인에 ㄱ자 형태의 주간주행등을 심어 패밀리룩을 완성했다. 측면에서는 앞뒤 바퀴 주변으로 볼륨감을 살리고 도어 쪽은 마치 조각칼로 깎아내는 입체적인 디자인으로 독특한 느낌을 보여준다. 후면은 트렁크 도어에 약간의 입체감을 더해놓았을 뿐 전반적으로 평평한 구성이 눈에 띈다. 트렁크 도어 상단에는 공기 저항을 줄이는 스포일러를 달아놓았고, 특이한 디자인의 테일 라이트도 시선을 끄는 요소다.

실내는 비교적 평이한 느낌이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인포테인먼트 스크린, 그 사이 공조장치 조절용 스크린이 하나로 묶여 대시보드 위에 얹혔다. 대시보드와 일체화된 느낌의 단축 메뉴 버튼이 센터 스크린 아래 놓였으며, 아래로 주요 기능 조절용 물리 버튼이 나와 있어 운전 중에도 편리하게 쓸 수 있겠다. 열선 시트나 통풍 시트와 같은 일부 공조 관련 기능 버튼은 도어 레버 쪽으로 이동했는데 공간 활용을 생각하면 이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센터 콘솔에는 필요에 따라 앞뒤로 조절할 수 있는 테이블이 장착됐는데, 이로 인해 콘솔박스가 사라져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긴 하지만 호불호 여부를 떠나 이런 새로운 시도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테이블 아래로 컵홀더나 스마트폰 무선 충전 패드가 배치되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깔끔한 공간을 선호한다면 이런 방식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라 본다. 이런 공간 구성의 결과 변속기는 스티어링 칼럼에 레버방식으로 장착되었고, 시동 버튼도 레버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공간은 차급 대비 상당히 넓은 편이다. 앞뒤로 성인이 타기에도 문제없고 뒷좌석은 리클라이닝 기능이 더해져 성인 4명 정도 탑승해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큰 문제 없겠다. 뒷좌석 등받이는 접어내리면 평평한 공간이 만들어져 많은 화물 적재나 차박 등의 용도도 거뜬하다. 트렁크는 바닥면 덮개를 한 층 내려 장착할 수 있어 더 넓은 적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보닛 아래에도 작은 수납공간이 있으므로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을 보관하는데 적합하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스크린 곳곳에 나타나는 NBA팀의 로고댜. NBA는 1990년대까진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지만 최근엔 마니아층만이 즐기는 편인데, 이번 EV3에는 인포테인먼트의 메뉴나 내비게이션의 차량 표시에 좋아하는 팀 로고를 선택해 넣을 수 있고, 심지어는 디지털 계기판에 차량이 표시될 때 농구팀 관련 디자인으로 랩핑된 EV3가 나타난다. 이 기능은 한국보다는 미국 시장을 겨냥한 것인데, 스포츠에 열광하는 비중이 높은 나라인 만큼 이런 요소들이 판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고. 확실히 문화 콘텐츠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는 점을 이런 부분에서도 느끼게 된다.

이번 EV3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또 있다. 바로 AI 기능을 탑재했다는 것. 기존에도 음성 명령을 통해 차량 기능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기아 AI 어시스턴트로 불리는 이 기능은 더 업그레이드된 결과물을 보여준다. 일정 관리나 최적 경로 설정, 여행 계획, 엔터테인먼트, 긴급 상황 지원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식당 예약을 요청하면 인원에 맞춰 예약까지 대신 해줄 뿐만 아니라 경유지에서 머무는 동안 차량을 충전할 경우 예상 충전량까지 알려주는 등 다양한 정보 안내가 가능하다.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라는 농담도 있었지만, 그 반대로 ‘똑똑하면 손발이 편해진다’는 말도 충분히 가능하게 만드는 실력이다.

이런 다양한 기능들도 눈길을 끌지만, 전기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얼마나 잘 달리는지, 그리고 얼마나 멀리 달리는지다. 그래서인지 오래간만에 서울에서 출발해 속초까지 가는 제법 긴 거리가 시승코스로 잡혔다. 롱레인지 모델에 탑재된 배터리는 81.4kWh 용량으로 출발 전 계기판에는 461km라는 주행가능거리가 표시되는데, 재밌는 점은 최대 주행가능거리와 최소 주행가능거리가 함께 표시된다. 93%의 충전량에서 기존 전기차에서 보기 드문 최대 657km, 최소 259km라는 주행거리가 표시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전기차의 약점으로 주행거리를 꼽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정도면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쉬지 않고 한 번에 주파하고도 전력이 충분히 남을 정도다. 이제 전기차에서 주행거리에 대한 부분은 고민의 요소에서 삭제해도 좋겠다.

도로로 나서서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기대했던 대로 경쾌하게 속도가 치솟아 운전이 한결 수월하다. 그동안 E-GMP 플랫폼 기반의 전기차들은 사륜구동으로 선보였지만, 이번 EV3를 필두로 전기차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전륜구동 기반의 플랫폼이 투입된다고. 앞 차축에 얹어진 전기모터는 최고출력 150kW, 최대토크 283Nm의 성능으로 최고속도는 170km/h를 살짝 넘긴 정도에서 시스템적으로 제한이 걸리는데 그동안 현대차나 기아에서 선보였던 제품들에 비하면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실용성 면에서는 이 정도면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다.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이나 고속도로 주행보조 2, 각종 충돌보조 및 서라운드 뷰 모니터 등 각종 안전 및 주행보조 기능들이 다양하게 탑재됐는데, 이번 EV3에서 새로 추가된 기능으로 i-페달 3.0과 스마트 회생 시스템 플러스가 있다. i-페달 3.0은 가속 페달 조작만으로 가속과 감속, 정차까지 모두 가능한 기능이고, 스마트 회생 시스템 플러스는 기존 전방 차량과의 거리나 속도를 기반으로 회생제동 단계를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기능에 새롭게 내비게이션 정보까지 더해 회생제동이 조절된다. 주행의 편의를 높이면서 효율적인 운전이 가능해 투입하는 기능이지만, 최근 차량 오조작으로 인한 사고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 기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된다. 기아 관계자들도 이에 대해 “기능 사용을 우선시하는 쪽보다는 원하는 사람만 기능을 사용하는 설정으로 제품을 출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승 중 눈길을 끄는 기능도 있었는데, 고속도로 주행 중 갑자기 계기판에 전방 도로에서 사고가 났다는 정보가 표시됐다. 바짝 긴장하며 전방을 살피며 달리고 있으니 얼마 되지 않아 앞 차량들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도로에는 안내대로 사고 차량이 서 있었는데 운전자들이 막 내려 사고 수습에 나서는 모습에서 사고가 발생한 지 채 몇 분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기능에 대해 기아 관계자들은 “내비게이션에 전달된 도로 정보를 바탕으로 안내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는데, 무선 업데이트 등을 통해 다른 차량에서도 안내 기능이 제공된다면 2차 사고를 예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참을 달리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지방도를 달리다 보니 와인딩 코스가 나타난다. 전날까지도 한참 비가 와서인지 언덕 위에서 물이 계속 도로로 흘러내리는 상황이라 평소보다는 속도를 낮춰 코너에 진입했다. 2톤을 가볍게 넘어가던 기존 전기차들과 달리 1.8톤 전후로 200kg 정도나 가벼운 차체 덕분에 움직임이 한결 가볍다. 머리를 돌려나가는 속도도 꽤나 민첩한데다 돌아나가는 과정에서의 차체 좌우 흔들림(롤)도 잘 억제된 모습이다. 짧게 끝나버린 와인딩 코스가 꽤나 아쉬움이 남을 만큼 민첩함을 보여준다. 

시승을 마치고 계기판 상에 표시된 전비는 5.3km/kWh. 공인 전비가 5.1km/kWh니 나쁘지 않은 성적표라고 생각했는데, 이날 함께 달린 기자들 중 가장 높은 연비가 무려 7.8km/kWh에 달했다. 큰 배터리 용량까지 생각하면 600km 넘게 달릴 수 있는 정도의 수준. 물론 공조장치 작동 여부나 기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최소한 어딜 가더라도 목적지까지 배터리 걱정 없이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아 EV3 가격은 58.3kWh 배터리가 탑재되는 스탠다드가 3,995만 원부터 시작하고, 81.4kWh 배터리의 롱레인지 모델은 4.415만 원부터 시작한다. 서울시 기준 실 구매가격은 3,269만 원부터 시작하고, 가장 많은 1.140만 원의 보조금이 지원되는 경상남도의 경우 2,855만 원부터 시작해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 나선 만큼 막강한 가격 경쟁력을 자랑한다. 여기에 다음 타자로 현대차의 캐스퍼 일렉트릭까지 등장하면 현대차그룹의 두 모델이 전기차 시장의 정체 현상을 걷어내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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