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하 월드 그랑프리 참전 60주년 기념 슈퍼스포츠 모델들

슈퍼스포츠 모터사이클은 경쟁을 통해 성장해왔다. 경쟁은 단순히 타 브랜드와의 판매 경쟁도 포함하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경쟁, 누가 더 빨리 달리는지를 겨루는 레이스에서의 경쟁을 통해 성장해온 것이다. 물론 현재 슈퍼스포츠는 초창기 모터사이클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현재 슈퍼스포츠의 형태는 경쟁에서 더 빠른 기록을 내기 위해 선수와 개발자들이 힘을 합쳐 조금씩 형태를 변형해 어느 정도 비슷한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일부를 제외하곤 브랜드마다 내세우는 슈퍼스포츠 모델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슈퍼스포츠라는 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브랜드와 제품이 있다. 바로 야마하의 YZF-R 시리즈다. 태생부터 레이스를 통해 성장해온 야마하인 만큼 이들의 제품은 다양한 레이스에서 활약해왔고, 지금도 맹활약중이다. 야마하 슈퍼스포츠 모델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 모습이고 미래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시작과 함께 한 레이스

아사마 고원 레이스에 참가한 야마하 YA-1

야마하는 태생부터 레이스와 깊은 연관을 맺어왔다. ‘고추잠자리’라는 별명이 붙었던 야마하의 첫 번째 모델인 YA-1은 후발 브랜드에서 만든 첫 번째 제품인데다 경쟁모델보다 가격 또한 높아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했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야마하는 1955년 후지산 등반 레이스에 참가를 결정한다. 당시 일본 모터사이클 업계에서 최대의 이벤트였던 이 경기는 후지산 24.2km를 모터사이클로 올라가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경기였다. 야마하에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만큼 대규모 팀을 꾸려 경기에 참가했고, 이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3, 4, 6, 8, 9위까지 10위 이내에서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적으로 단번에 주목받게 됐다. 여기에 아사마 고원 레이스에서도 1위부터 4위까지를 모두 휩쓸며 일본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후 야마하는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레이스에 참가시키는 것으로 성능과 기술력을 입증했다. 월드그랑프리(WGP, 현 모토GP의 전신)에는 레이스 전용 모델을 투입하기도 했지만, 전용 모델을 바탕으로 양산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등으로 레이스와의 관계를 끈끈하게 이어갔다.

2022년 굿우드 페스티벌에서 데모 런을 펼친 YZR500

레이스에서 활약하며 승승장구한 야마하는 1973년 새로 개발한 레이스용 모터사이클에 처음으로 YZR500이라고 이름붙이며 지금의 슈퍼스포츠 라인업에 이어지는 YZF라는 제품명의 시발점이 됐다. YZ라는 이름이 시작됐지만, 당시 생산하던 리터급 슈퍼스포츠 모델에는 YZ가 아닌 FZ로 시작하는 이름이 사용됐다. 이는 WSBK와 같은 레이스 배기량 규정이 750cc로 제한되어 레이스와 관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1987년 FZR1000의 경우 배기량 제한이 없는 맨섬 TT의 오픈 클래스 등에서 활약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으니 저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 

YZF-R1으로 이어지는 YZF1000R 썬더에이스

YZ의 이름을 양산 제품에서 처음 사용한 것은 1996년으로, YZF1000R 썬더에이스가 그 시작이었다. FZR1000에 탑재된 1,002cc 직렬 4기통 20밸브의 제네시스 엔진과 YZF750R의 프레임을 더한 모델로, 스포츠 투어러의 성향이 강한 모델이었음에도 맨섬 TT에도 참가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보였다. 이 썬더에이스의 뒤를 이은 것이 야마하의 슈퍼스포츠 플래그십인 YZF-R1이다. 

YZF-R1 이전의 호물로게이션 모델인 YZF-R7

R1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호물로게이션 모델은 YZF750R과 여기서 이어지는 YZF-R7으로, 120마력의 성능에 지금 시점에서 봐도 상당한 고성능 파츠를 탑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유럽 인기 모델인 FZR600R의 뒤를 이은 YZF600R 썬더캣도 야마하 슈퍼스포츠 라인업에 합류해 YZF-R6로 이어지고 이후 엔트리 라이더를 위한 YZF-R125,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YZF-R3까지 선보이며 엔트리부터 리터급까지 아우르는 야마하 슈퍼스포츠 라인업이 드디어 완성된다. 

 

야마하 슈퍼스포츠 'R'

여러 슈퍼스포츠 모델들이 야마하 역사의 한 페이지씩을 장식했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R로 대표되는 모델들이야 말로 야마하 슈퍼스포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나온, 그리고 앞으로 나올 R 시리즈들의 주요 특징에 대해 알아보자.

YZF-R1

초대 YZF-R1

1997년 EICMA에서 처음 공개되어 150마력의 출력을 내는 리터급 슈퍼스포츠를 단 177kg의 무게로 구현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당시 호물로게이션이 4기통은 750cc, 2기통은 1,000cc였기 때문에 레이스보다는 일반도로용에 초점을 두고 있는 모델이었다. WSBK와 같은 정규 레이스에는 참가할 수 없었지만 양산차 기반의 슈퍼스톡 레이싱이나 맨섬 TT 등에서는 뛰어난 성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특히 데이비드 제프리가 1999년 R1을 타고 맨섬 TT에서 3회나 우승하며 성능을 입증했다.

R1의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인 델타박스 프레임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R1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델타박스 프레임은 2002년부터 적용됐다. 하이드로포밍 구조를 적용해 용접 부위는 줄이고 강성은 30% 높이는 등의 변화로 더욱 향상된 성능을 발휘했다. 여기에 경량화와 성능 향상을 더해 2004년에는 172마력의 엔진과 172kg의 중량을 달성해 출력 대 중량비 1:1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하며 슈퍼스포츠 클래스에서 다시 한 번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2015 YZF-R1M

최근 야마하에서 적극 도입하고 있는 ‘크로스플레인 철학’의 시작인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는 2009년 R1에서 처음 적용됐다. V트윈의 불균일한 점화순서를 재현하도록 타이밍이 변경되어 흔히 ‘빅뱅 엔진’이라고 불렸다. 그럼에도 부드러운 동력 전달 특성을 지닌데다 라이딩 모드가 처음 적용되어 리터급에 막 입문한 사람도 적응이 한결 수월했다고. 덕분에 2009년 신인 벤 스피스와 함께 WSBK에 출전한 R1은 야마하에게 첫 타이틀을 안겨주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2014년에는 드디어 200마력의 벽을 깨며 고성능 경쟁에 참전을 선언한다. 향상된 성능에 걸맞게 최첨단의 6축 관성측량장치를 비롯해 이를 기반으로 하는 트랙션 컨트롤, 슬라이드 컨트롤, 앞바퀴 들림 방지, 코너링 ABS, 론치 컨트롤 등 전자 패키지가 대거 투입된다. 여기에 올린즈 서스펜션과 카본 파이버 차체 등 고사양 장비가 더해진 R1M을 한정판으로 출시했다. 

일반도로용 YZF-R1은 단종되고 레이스 사양만 판매한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이어온 YZF-R1이 올해 공식적으로 일반도로용 제품은 판매를 중단한다고 밝혀 많은 라이더들이 아쉬움을 표했다. 야마하는 대신 트랙에서만 주행할 수 있는 YZF-R1 레이스 사양을 별도로 출시, 명맥을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YZF-R6

4기통 600cc 모델 최초로 100마력 이상의 성능을 낸 초대 YZF-R6

현재도 SBK 레이스에 보면 슈퍼바이크 클래스가 있고 슈퍼스포츠 클래스가 있는데, YZF-R1의 슈퍼스포츠 버전으로 출시된 것이 바로 이 YZF-R6다. 4기통 600cc 엔진으로 108마력의 성능을 냈는데, 개조하지 않은 차량으로 100마력 이상을 낼 수 있는 최초의 600cc 모델이었다고 한다. 

2017년 공개한 신형을 끝으로 YZF-R6는 단종 수순에 들어간다

이후 여러 가지 업데이트를 거쳤지만, 워낙 걸출한 성능을 보여준 R1에 밀려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는데, 지난 2017년 R1 기반의 각종 업그레이드를 거친 신형이 출시되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모델을 끝으로 YZF-R6는 단종됐으며, 덕분에 중고 시장에선 시간이 갈수록 거꾸로 가격이 오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YZF-R125

125cc라고는 믿기지 않는 세련된 디자인과 고사양 파츠로 프리미엄 125cc의 시대를 연 YZF-R125

2008년 2행정이던 TZR125의 후속으로 출시된 4행정 스포츠 모터사이클로, 유럽 시장을 겨냥해 출시된 모델이다. 델타박스 프레임에 역방향 텔레스코픽 포크 등 125cc 모델임에도 꽤나 고사양의 장비들을 탑재했는데, 국내에서는 2010년에 출시되어 프리미엄 125cc 모터사이클로 많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유럽에서는 지속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며 4세대 모델까지 출시됐고, 공기역학을 고려해 페어링을 재설계하고 스마트폰 연결 기능을 더한 5인치 풀컬러 TFT 계기판 탑재 등의 변화가 있다. 

YZF-R3

고배기량 입문용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YZF-R3

R1, R6, R125까지 다양한 모델이 있지만, R125와 R6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특히 R125로 입문한 사람이 R6로 곧바로 넘어가기에는 성능의 차이가 거의 10배에 가까운 정도여서 다루기도 어렵고, 적응하기도 쉽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이 차이를 메우기 위해 야마하는 2015년 2기통의 YZF-R3를 선보여 125cc를 막 벗어난 라이더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321cc 엔진은 42마력의 출력으로 약 180km/h 전후의 최고속도를 내 레이스 입문용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25년형 모델에선 공기역학 성능을 강화하기 위해 통합 윙렛을 포함한 새로운 페어링 디자인이 적용됐고, A&S 클러치, LCD 계기판 변경 등의 여러 변화가 이뤄졌다.

YZF-R7

1999년 500대 한정으로 출시한 YZF-R7

R7이라는 이름으론 2종의 제품이 존재한다. 먼저 1999년에 나온 제품은 YZR500을 기반으로 하여 당시의 호물로게이션을 충족시키는 모델로 만들어졌으며, WSBK와 스즈카 8시간 내구레이스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됐으며 전세계 500대 한정 판매했다. 4기통 749cc 엔진은 106마력의 성능을 냈으며, 레이스킷을 더해 인젝션 뱅크가 활성화되면 135마력을 넘겼다고 한다. 여기에 앞뒤 서스펜션 모두 올린즈 제품에 티타늄제 밸브와 커넥팅 로드, 델타박스 II 프레임, 189kg의 건조중량 등 레이스에 적합한 고성능 모델로 탄생시켰다.

다루기 쉬우면서도 공격적인 포지션으로 미들급 입문에 적합한 2022년 YZF-R7

2022년에 다시한번 R7이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1999년 모델을 바탕으로 한 고성능 모델이 나올 것으로 예측되기도 했지만, 실제 나온 모델은 기존 MT-07에 탑재된 2기통 CP2 엔진을 탑재해 성능 면에서 다루기 쉬운 미들급 슈퍼스포츠로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포지션은 기존 R3보다 훨씬 공격적이어서 서킷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는데 적합하다.

YZF-R9

YZF-R9

2025년 출시 예정인 야마하의 새로운 슈퍼스포츠 플래그십 모델. 기존 R1이 단종됨에 따라 그 자리를 메울 모델이 필요한데, 야마하는 MT-09의 3기통 CP3 엔진을 탑재한 신제품 YZF-R9을 공개했다. 이번 모델은 모토GP 규정 변경과도 관계되는데, 현행 1,000cc 엔진을 850cc로 낮출 예정이고 이러한 기준에 맞춰 각 사가 제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야마하에서는 이 CP3 엔진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재 CP3 엔진이 배기량 규정인 850cc를 넘는 890cc여서 안맞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첫 CP3 엔진이 847cc로 규정에 부합하는 만큼 1세대 엔진을 바탕으로 모토GP에 맞춰 최적화하는 작업이 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R9에는 최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집약해 높은 성능을 발휘하도록 했다. 먼저 외관에선 다운포스를 높이기 위한 윙렛이 적용되어 직선에서의 앞바퀴 들림을 감소시키고 코너링시 그립력을 10% 높인다고 한다. 프레임은 델타박스 스타일의 프레임으로, 중력 주조 방식을 이용해 비틀림 강성이나 종/횡방향의 강성을 모두 높이면서도 무게는 역대 가장 가벼운 9.7kg 밖에 나가지 않아 차량 전체의 경량화에 크게 기여한다고.

6축 관성측량장치(IMU)와 함께 다양한 보조 기능들이 탑재되고, 이를 야마하 라이드 컨트롤(YRC)를 통해 일괄적으로 변경이 가능하다. 계기판은 5인치 TFT 디스플레이가 탑재되는데, 일반적인 스마트폰 연결 기능과 함께 Y-TRAC 앱을 통해 서킷 주행 시 차량의 각종 정보들을 받아볼 수 있으며, 서킷 주행 중 대시보드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가상 피트보드 옵션도 갖췄다.

R1처럼 긴 역사를 지닌 제품이 사라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시대가 변화하면 제품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강화된 환경규제와 이에 따르는 막대한 개발 비용, 그리고 주요 레이스의 규정 변경 등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야마하는 손놓는 것이 아닌,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산업 전반이 쉽지 않은 상황을 겪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야마하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슈퍼스포츠의 시대에서 야마하가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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